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미니가 찾아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브라만들은 말합니다. 살아생전 온갖 나쁜 업을 지은 사람이라도 자신들이 제사를 잘 지내주면 지은 모든 죄가 없어져 천상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입니까?”
“가미니야! 브라만들이 그렇게 말하느냐? 내가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으니 따라 오거라.”
부처님은 가미니를 데리고 연못으로 가셔서는 무거운 돌을 하나 집어 그곳에 던지셨다.
“돌이 어떻게 됐는지 말해 보거라.”
“물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은 돌을 다시 물위로 떠오르라고 브라만이 기도한다면 돌이 물 위로 뜨겠느냐?”
“뜨지 않습니다.”
“왜 뜨지 않느냐?”
“물 보다 무거운 돌이 밑으로 가라앉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와 같음이다. 무거운 돌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듯 사람의 업 또한 그러하다. 어떤 사람이 정진하지 않고 산목숨을 함부로 죽이고 남의 것을 훔치고 사음을 행하고 거짓된 말을 하고 삿된 소견을 갖는 등의 악업을 지으며 한평생 살았다. 브라만들이 이 사람이 죽은 후에 이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냈다. 이 사람이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번에는 기름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셨다. 막대로 항아리를 쳐서 깨뜨리니 항아리 속에 있던 기름이 흘러나와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기름이 어떻게 됐는지 말해 보거라?”
“기름이 물 위에 떠 있습니다.”
“떠 있는 기름을 물 아래로 가라앉으라고 브라만이 기도한다면 기름이 물아래로 가라앉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가라앉지 않느냐?”
“물 보다 가벼운 기름이 물 위로 뜨는 것 또한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와 같음이다. 날마다 정진하며 착한 업을 쌓고 산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남에게 베풀고 바른 말과 올바른 소견으로 한평생 바른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 이를 시기한 다른 이들이 이 사람이 죽은 후에 이 사람을 지옥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사람이 지옥에 태어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불교경전 ‘중아함경’에 수록된 이야기다. 네 글자로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고 자작자수(自作自受)이고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이 또한 ‘중아함경’에 수록된 부처님의 말씀이다. 연기(緣起)는 부처님이 처음 설하시고 재차 말씀하시고 거듭 강조하신 근본 가르침이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의 근간이다. 직접 원인인 인(因)과 간접 원인인 연(緣)이 만나 상호작용하여 결과(果)를 낳는 것을 인연과보(因緣果報)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콩을 땅에 심는다 치면 심는 행위와 씨앗인 콩이 인(因)이 되고 씨앗이 심겨진 땅과 부는 바람과 내리는 비와 쬐는 햇볕 등의 환경과 외부 조건은 연(緣)이 된다. 인과 연의 상호 관계로 만들어 지는 또 다른 콩은 과(果)가 된다.
출호이자 반호이자야(出乎爾者 反乎爾者也)
남 탓 잘하던 추(鄒)나라 왕 목공(穆公)이 맹자(孟子)에게 조언을 구하자 증자(曾子)의 말을 빌려 맹자(孟子)가 한 충언이자 팩폭이었다. 그 뜻 풀어보면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 돌아간다.’이다. 누군가에게 지금 해주고 싶은 말이다.
45년만이었다. 이 땅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명분도 절차도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해제 되었지만 후폭풍은 국민의 몫으로 남겨졌다. 2022년의 자업자득이다.
맹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한 남자의 뜻에 반하면 반국가세력이 된다. 공동체생활을 하는 석가모니의 승가(僧伽)는 공산세력이 된다. 우리는 지금 2024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