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에 겨울이 왔다. 호수 언저리마다 조금씩 얼음이 얼고 있다. 하지만, 1.5m에서 2m 두께에 이르는, 호수 밑바닥이 내려다보이는 바이칼의 진정한 투명 얼음을 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 소위 그러한 바이칼의 진짜 얼음 시즌은 2월 초에나 시작한다.
바이칼의 어원은 자연을 뜻하는 몽골어 ‘바이갈’, 풍요로운 호수라는 의미의 튀르크어 ‘바이쿌’을 비롯해 ‘신비로운, 하늘의 물, 먼 북쪽의 호수’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이칼 호수로는 전체 336개의 강이 유입되는데, 호수 바깥으로 나가는 강은 안가라가 유일하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는 아버지 바이칼 신과 딸 안가라, 336명의 아들과 관련된 여러 다양한 신화와 전설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인근의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를 품었다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러시아 작가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알렉산드르 밤필로프와 발렌틴 라스푸틴, 두 사람은 1937년생으로 이르쿠츠크국립대학교에서 수학하며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밤필로프는 ‘천사와의 20분’, ‘지방에서의 일화’, ‘6월의 작별’, ‘출림스크에서의 지난 여름’과 같은 드라마를 집필했다.
그의 드라마는 소극장에서 만나야 제맛이다. 주로 시베리아 소도시 작은 마을을 작품 배경으로 1960~70년대 탈출구 없는 젊은 소비에트 청년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깊은 여운을 관객 앞에 선사한다. 1972년 8월, 자신의 생일을 이틀 남겨놓은 어느 날 바이칼 호수에서 타고 있던 배가 전복되는 사고로 그는 35년의 생을 마감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을 향해 가다 보면 안가라강과 바이칼이 합류하는 근처 언덕 위에 밤필로프의 기념비가 있다.
필자는 2015년 세상을 떠난 발렌틴 라스푸틴을 그의 생전 세 차례 만났다. 이웃집 아저씨같은 편안한 표정과 복장을 한 그는 필자가 내민 1974년 작품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책 표지 안쪽에 자신의 서명을 남겨주었다. 이 작품은 독소전쟁이 진행 중인 1944년과 1945년 안가라강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전장에서 부상을 당한 주인공 안드레이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부모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노보시비르스크 군 병원에 후송되지만 부상의 정도가 경미하다며 군 복귀 명령을 하달받는다. 그는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전쟁터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는 여러 편의 열차를 마냥 흘려보내고 마침내 이르쿠츠크가 있는 동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그의 탈영이 시작됐고 세상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안드레이와 아내 나스쬬나, 밤마다 얼음이 언 안가라강 위로 이 두 사람의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만남이 시작된다. 군을 제대하고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서쪽 전장인가, 삶이 있는, 아내가 있는 동쪽으로 향할 것인가’를 놓고 무수한 생각이 오갔을 플랫폼의 젊은 안드레이의 모습에 동정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전장에서 경험했을 삶과 죽음의 고비,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을 외면할 수 없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많은 전쟁 영웅이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가족과도 같은 이 두 나라의 싸움터에서 어떤 전쟁 영웅이 탄생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을 원치 않는 양국의 탈영병 수가 최근 더욱 늘고 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하는 젊은 영혼, 그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당신은 이 더러운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가. 잘못된 지도자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수십만의 양국 청년들이 이미 목숨을 잃었고 또 그만큼의 수가 또다시 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어리석음을 넘어 사악한 지도자가 내린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21세기 오늘, 지척의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집으로, 고향으로 돌려보낼 때다. 생사의 고비에서, 죄의식의 고리에서 수많은 안드레이들을 살려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