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축(西竺) 소림(少林)의 산봉 오롯한 방랑자여.
몇 번이나 되돌아 채운루(彩雲樓)에 다시 올라보니
화양(華陽)의 무한한 풍류경에
만동묘 사당 속의 만 가지 수심도 다 하였구나.
반갑습니다. 이 곳 백두대간 속리산 화양구곡의 채운암에는 새하얀 야생
구절초가 축복처럼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탁마할 공안은 단도직입형 공안인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6.입니다.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 공안은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살생이라는 극단적 수단도 용인된다는 식의 논리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숭고한 목적이 항시 변화하는 세상 만물의 흐름 속을 바르게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고정된 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논리와도 전혀 위반되지 않는 논리체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전 선사 또한 아무리 대의라고 하지만 불살생계를 범한 엄밀한 인과는 분명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오직 하나만의 해석을 가진다는 것은 대개 보편주의를 빙자한 권력의 논리이자 야만적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동시에 모든 해석에 대한 용인은 정말 괴물 같은 이데오로기의 탄생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남전 선사는 고양이를 죽였고, 여기서 남전 선사가 제자들에게 법을 바로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법을 올바로 전해야겠다는 의도를 이야기하는 방편으로, 고양이의 목을 벤 것은 고양이 목을 벤 사실 보다는 대중이 모양에 속아서 법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의 무명을 단 칼에 베라는 함의에 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진짜 의미는 생명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무명을 베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금강경'에 법에는 동서남북이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동당의 고양이도 서당의 고양이도 없는 겁니다. 다만 동당의 고양이 서당의 고양이를 말하는 그 마음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법에는 너도 나도 안도 밖도 없습니다. 분별하지 않는다면, 호랑이 목을 자르든 용의 목을 자르든 고양이 목을 자른다고 말하는 이 마음이나 다 같은 하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납자들이 고양이를 살리고 죽인다는 말에 걸려 넘어져 버리게 된다면, 이미 마음을 볼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부처나 법이나 깨달음이라는 말에도 걸려 버리게 된다면, 진리는 올바로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양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말은 말이 아니고 개념은 개념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며, 그대로 법이면서 오직 하나의 법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분입니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신발을 머리 위에 얹고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겁니다.
선(禪)이란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 말이 끊어진 자리 바로 이 마음자리 하나를 일러보라고, 남전 선사는 고양이 목을 벤다고 한 겁니다. 죽고 살고 하는 사량 분별에 구속된다면 이 마음 하나를 바로 볼 수 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남전 선사 자신이 던진 질문은 처음부터 고양이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선악의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고, 일대사 인연의 화두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는 말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1.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낮은자의 목소리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