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두월괘운문병 문외수류조주다 (山頭月掛雲門餠 門外水流趙州茶)
개중하자진삼매 구월국화구월개 (箇中何者眞三昧 九月菊花九月開)
산허리에 걸린 달은 운문의 떡이요. 문 밖에 흐르는 물은 조주의 차로다.
이중 어떤 것이 전정한 삼매냐 묻는다면 구월 국화는 구월에 피도다.
양산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이셨던 경봉스님의 선시(禪詩)다. 운문(雲門)과 조주(趙州)는 옛 중국의 선사(禪師)들이다.
운문은 떡을 좋아했다. 떡 중에 호떡을 좋아했다. 조주는 차를 즐겼다. 경봉스님이 산허리 걸린 둥근달 보고는 호떡을 떠올리며 운문을 시로 끌어들이고 흐르는 물 보고는 조주와 차를 떠올렸을 만큼 그들은 떡을 좋아하고 차를 즐겼다.
“무엇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말씀입니까” 한 수좌가 운문선사에게 묻는다. “호떡이다” 운문의 답이다. 이것이 벽암록의 운문호병으로 `운문의 호떡'이라는 뜻의 화두다.
조주선사는 차를 즐기며 살다보니 인구에 회자되는 화두도 남긴다. 어느 날 두 수행승이 조주선사의 가르침을 얻고자 찾아왔다.
그는 그답게 차를 준비해 그들을 맞았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하고 조주가 한 수행승에게 물었고 “아닙니다. 와본 적이 없습니다.”하고 답하니 “차나 한 잔 마셔라.”하였다. 또 다른 수행승에게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하고 똑같이 물었고 “네. 일찍이 와본 적이 있습니다.”하고 답하니 “차나 한 잔 마셔라.”하였다.
이를 옆에서 보고 있던 원주스님이 “스님 어찌하여 일찍이 와본 적 없던 이도 `차나 한 잔 마셔라'하고 일찍이 와본 적 있던 이에게도 `차나 한 잔 마셔라'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너도 차나 한 잔 마셔라.”하였다. 급기야 원주스님 옆에서 차를 따르던 시자(侍子)도 “아니 스님은 누가 와서 무엇을 묻든 `차나 한 잔을 마셔라' 답하시는데 저는 그 뜻을 도통 모르겠습니다.”하니 조주는 “그래 너도 차나 한 잔 마셔라”하고 답했다는 이야기.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 이것이 그 유명한 화두인 끽다거(喫茶去)이다.
잡념을 물리치고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불가에서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두 선사는 떡 먹을 때는 떡만 생각하고 차 마실 때는 차만 생각했다. 그들에게 떡과 차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 삼매의 대상이었다. 경봉스님은 두 선사들의 이야기에 `개중하자진삼매구월국화구월개' 14자를 덧붙여 당신 뜻을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봉스님 또한 선사다. 운문과 조주의 삼매가 먹고 마시는 채움이었다면 경봉스님의 삼매는 비움이었다.
해우소. 절집에서 흔히 변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를 처음 쓴 이가 경봉스님이다.
필자도 경봉스님에게 이래저래 빚지고 사는 셈이다.
해우소 문패가 처음 내걸린 곳은 경봉스님이 조실로 계시던 통도사 극락암의 변소였다. 큰일 치루는 곳에는 해우소를 걸고 작은일 보는 곳에는 휴급소를 걸었다.
그 뜻 풀자면 해우소(解憂所)는 근심을 해결하는 곳이고 휴급소(休急所)는 급한 것을 쉬어가는 곳이다. 인간 대소사 가리지 말고 가장 급한 것부터 풀라는 큰 뜻 담겼다.
수행이라는 것 거창할 것도 요란할 것도 없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수행이고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것이 도(道)이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차 마실 때 차 마시고 똥 눌 때는 똥 누라는 얘기다. 우리는 다른 곳도 다른 시간도 아닌 지금 이곳에 다만 있을 뿐이다. 순간에 대한 집중이 삶에 대한 집중이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의 마무리이자 미래의 시작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일찍이 깨달은 자이다.
시간의 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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