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家 길목 언덕에 들국화가 피기 시작했다. 몸을 닿을 듯 낮게 누이고 가지마다 올망졸망 노란 꽃망울이 매달려 나 좀 보고 가라 손짓한다.
그 여린 손짓이 사무치듯 가슴에 닿아 천상병님의 시 `들국화'를 낮은 소리로 읊조려 보았다.
산등성 외 따른 데/ 애기 들국화/바람도 없는데/괜히 몸을 뒤뉘인다/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친정집 앞마당에도 노란 국화꽃이 활짝 피어 마당을 환하게 빛내고 있다. 찬 바람이 불면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국화꽃이다. 단연 가을꽃들의 주인공은 국화라 할만하다.
꽃차를 처음 알게 되고 맛을 보게 된 차가 국화차였다. 평소 다니던 사찰에서 국화차를 팔았는데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에 한 봉지 사 들고 온 것이 시작이었다. 때마침 지인에게 작은 유리 다관을 선물 받은 것도 있어 기분 좀 내보고 싶기도 했다.
절에서 돌아와 유리 다관에 꽃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맑고 노란 찻물이 우러나며 국화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한 모금 입 안에 머금고 맛을 음미해보니 살짝 달콤한 듯 맹숭맹숭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이미 자극적인 음료인 길들어진 입은 국화차의 맛을 낯설어했다. 하지만 다관에서 동글동글 말려있던 꽃들이 뜨거운 물에 서서히 피어나며 은은한 향기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터라 맛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저 마른 꽃이 물속에서 피어나 하늘거리며 향기를 품어내는 것이 신기해 며칠 동안 차를 우리고 마셨다. 신기한 것은 국화차를 마시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그렇게 국화 꽃차의 맛과 은은한 향기가 시나브로 내 입맛에 스며들었다.
십수 년을 넘게 국화 꽃차를 즐기면서도 꽃차라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커피와 다른 나의 기호 음료쯤 여겼을 뿐이다.
꽃을 너무 좋아해서일까. 운명처럼 꽃차를 배우게 되었다. 꽃차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면서 “아~ 이래서 국화차를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거였구나”라고, 탄식하듯 국화차의 효능을 깨닫게 되었다.
국화차는 비교적 호불호 없이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즐겨 마시는 꽃차 중 하나이다.
아울러 사람에게 좋은 성분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다.
동의보감에는 국화차를 꾸준히 마시면 혈기를 왕성하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하고, 쉬 늙지 않으며, 위장을 편안하게 하고, 현기증 감기 두통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오장을 도울 뿐 더러 사지를 고르게 한다고도 했다.
과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실질적으로 증명된 과학적인 근거와 수치로 국화의 좋은 성분들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항산화 성분인 플라보노이드와 비타민C가 들어 있어 체내 유해산소를 줄여주고 피로 해소와 염증과 면역력 강화에도 효과가 있다. 등등.
바야흐로 국화의 계절이다. 몸에 좋다고 세상의 모든 국화로 차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식용국화로 쓰일 수 있는 꽃이어야 탈이 없다. 수많은 종류의 국화 중에 차로 덖음을 해서 꽃차로 만들 수 있는 국화꽃은 달달 한 맛과 향이 일품인 감국이 최고다. 국화는 독성이 있어 차를 덖기 전에 반드시 감초와 소금을 넣고 증제를 한 다음에 덖음을 해야 제대로 된 차 맛을 즐길 수 있다.
유리 다관에 국화가 만발이다. 우러난 찻물이 참 맑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는 깊어 가는 가을에 향기를 덧댄다. 다시 천상병 님의 시를 읊조려 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시간의 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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