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이용해 처갓집 고구마밭에서 일손을 돕다 왔습니다.
트랙터로 한 고랑을 뒤집어 놓으면 캐고, 선별하고, 종이 박스에 담아 쌓아놓으면 어찌 알고 지나가는 차들이 하나 둘 멈추어 사 가는 것을 보며 `아! 나도 안 캐고 사 먹고 싶다'라는 불순한 생각을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밤고구마를 3박스나 얻어 차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밤고구마를(특히 아주 퍽퍽한) 쪄서 입에 한가득 넣고 오물오물거리며 야금야금 녹여(?) 먹다 식도와 위 그 사이의 어딘가를 막아 가슴을 퉁퉁 치다 시원한 물 한 잔(우유가 있다면 더 좋죠)을 마셔 내려 보낼 때의 그 느낌을 좋아합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위험하죠. 이런 답답한 저를 가족들은 `그러다 언젠가 죽지'하는 눈빛으로 매번 처량히 보고 있습니다.
뚱딴지같은 서론이 길었습니다.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 옛 드라마나 영화를 봅니다. 그러면 밤고구마가 떠오릅니다.
옛날 영상물은 대사와 대사 사이의 간격과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져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가족들에게 “드라마 답답하지?”라며 동의를 구하면 “당신이 제일 답답해”라고 말을 듣곤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OTT(Over the top, 케이블 연결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영화, 방송, 음악 등 각종 디지털 콘텐츠를 수신하는 방식)를 통해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원하는 디바이스(장치)로, 시청 시간과 콘텐츠를 선택하여 소비합니다.
이 흐름은 점차 짧아지고 짧아져서 `5분 순삭', `3분 요약' 등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콘텐츠들이 성행하는 시대로 바뀌게 되었죠. 이런 속도에 익숙해진 세대에게(저조차) 과거의 콘텐츠의 답답함과 느림을 견디며 시청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죠. 이러다 보니 요즘 극장에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것도 어느 부분 이해가 되곤 합니다.
상대적 속도라는 것은 관찰자가 관찰하는 대상의 속도를 말합니다. 정확하게 나누기는 어렵지만 유년,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노년의 어딘가의 삶 속에 우리는 속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 계속 빨라지는 것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대상들의 속도가 달라지는 시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겠죠. 어디서 읽은 말처럼 세상에는 틀린 것은 없고 다른 것만 있기에 그 차이를 인정해 주며 살아가는 넉넉함과 이해심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쉽게 지루해하고 또 쉽게 포기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상대적 속도가 다른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참고 견디면 나아질 거야', `노력하면 보상이 따라와',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 등의 진심 어린 말들이 그리 쉽게 와 닿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좀 더 명확하게 각 단계가 이어져 나가는 과정을 제시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를 하나하나 제시해 주는 것이 스스로 목표 의식을 설정하고 자기주도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보면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삶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도 기성세대의 삶과 가치관이 밤고구마 100개 정도의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겠고요.
이젠 각자 한 걸음씩 뒤로 빠져 상대적이며, 틀리지 않고 다른 삶과 속도를 인정해 주며 응원하고 이해해 주는 것으로 하시죠.
어차피 우리 모두 비슷한 시간 속에서 같은 경험들을 겪으며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구용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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