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의 여인 권혜경은 193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가족과 함께 의정부로 이주하였다. 동구여상을 거쳐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하여 1세대 소프라노 이관옥에게 사사 받았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이후 조흥은행에 다니던 중, 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1956년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에 응모한다. 그 때 `오 대니보이'를 불러서 전속가수로 발탁된 것이 가수로서의 첫걸음이다. `사랑이 메아리칠 때'를 부른 청주 출신 원로가수 안다성이 동기이다.
이듬해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산장의여인'으로 데뷔하여 대중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산장의 여인은 당시 창원시 가포동에 위치해 있던 국립마산요양원이 주 배경이다. 어느 해 마산 출신인 반야월이 위문 차 마산 결핵요양원에 방문하여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고 나니, 객석 뒤편 창백한 얼굴을 한 미모의 여인이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 건너 숲속에 있는 `산장병동'에서 폐결핵으로 요양중이었다.
반야월에 따르면 당시 불치병이었던 결핵을 노래로 치유하고픈 심경에서 가사를 쓰게 되었단다. 한편 작곡가 이재호 역시 마산요양원에서 결핵으로 한쪽 폐를 제거하였다고 하니 반야월의 가사가 얼마나 더 절절했을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시는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가 인기절정이던 때, 특히 드라마로 힛트한 것을 후에 영화화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동심초'가 그 중요한 예다. 동심초는 당나라 시대 유명한 기생이자 여류 시인이었던 설도의 춘망사(春望詞)라는 시를 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번안하여 노랫말을 만들었고, 여기에 김성태가 곡을 붙였다. 이미 드라마로 힛트한 동심초가 1959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각색되었다. 노래는 애조를 띤 클래식풍에 익숙한 권혜경의 가슴 절절한 목소리로 공전의 힛트를 한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동심초가 권혜경의 맑고 애절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던 그 해 권혜경은 심장판막증 판정을 받게 되고, 이후 자궁암, 후두암 등 줄곧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뜸해진 가수활동을 뒤로 하고 전국의 교도소, 소년원 위문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재소자들의 `처녀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다. 이때 그녀의 인생관은 `덤으로 사는 인생, 봉사로 즐긴다'였다.
조부와 부친의 고향이 인근 옥산면이라는 인연으로 1988년에는 무의탁 수형자들의 기거를 목적으로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315번지에 1천3백평을 마련하였다. 1994년 5월부터는 이곳에 둘째언니 권오택의 아들인 건축가 원유택이 설계한 자그마한 산장을 짓고 정착하여 `산장의 여인'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소녀처럼 노후를 보낸다.
2008년 5월 24일 저녁,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가 열린 잠실 스타디움에서는 조용필이 5만 관객과 함께 부른 산장의 여인이 울려 퍼졌다. 이튿 날 권혜경은 생을 마감했다.
권혜경에게 있어 청주는 선대의 고향이었으며 또 청주 청원에서 6‧25 전쟁을 피해 피난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어, 그녀에게는 노년을 보낸 청주가 태어난 삼척과 어린시절의 의정부에 버금가는 고향같은 곳이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머물던 산장은 지금 없어지고, 2019년 11월 23일, 문의문화재단지 한켠에 `산장의여인' 노래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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