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천주교, 기독교 신앙의 궁극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인가? 단지 죽은 뒤에 가야 할 천국행 입장권을 예매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신앙생활의 전부일 수는 없다. 기독교 천주교 신앙의 핵심은 매 순간 제 안의 온갖 주견을 부인하고 비워내며,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는 것이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난다는 것을 불교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온갖 업식을 녹이고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무아를 깨닫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야 비로소, 언제 어디서나 팔이 안으로 굽는 일 없는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고 보살피는 아름다운 삶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매 순간 성령의 도구로 쓰이며, 자신의 만족이나 이득이 아닌,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심령 가난한 자의 일상이 아닐까? 특히 자기 자신의 만족과 제 이득을 위한 온갖 지식과 논리로 네 편 내 편 나눌 것 없이, 원수조차 사랑하는 크고 참된 사랑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된 삶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도구가 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심령 가난한 자의 사명 중에서도, 빛의 역할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최후의 만찬을 나눈 뒤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처럼, 밝고 따듯한 마음으로 주변 인연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착한 일처럼 보여도, 자신의 이득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행하는 행위는 이미 선행이 아니며, 더더욱 빛의 역할이라고 해선 안 된다.
소금의 역할은 주변의 문제점과 그릇됨을 밝히며 냉철한 이성으로 문제점을 바로잡음으로써,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사랑의 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불교적 표현을 빌리면, 올바름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따듯한 사랑으로 이웃을 포용하는 빛의 역할은 섭수 자비가 되고, 그릇됨을 밝히며 냉철한 이성으로 이웃의 잘못을 바로잡는 소금의 역할은 절복 자비라고 할 수 있다. 성전 안에서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의 테이블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뒤엎고,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을 만든다”며 그들을 내쫓은 예수님의 행위가 바로 소금의 역할이다. 좋은 게 좋다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한 교활한 처세술을 벗어 던지고 필요하면 과감하게 채찍을 휘두르는 역할도 감당하면서, 자신의 손에 똥이 묻을 것을 잘 알면서도 기꺼이 똥을 치우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절복 자비다.
빛과 소금의 역할 중에서도 특히 소금을 역할을 할 때는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사람의 입장 만을 고집하며 수표가 귀하다는 분별에 사로잡힌 채, 수표를 외면하고 똥이나 뼈다귀에 꽂히는 개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원수조차도 포용하는 큰 사랑으로 목전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한 후, 당근보다 채찍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더 이상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큰 사랑으로 따끔하게 소금을 뿌릴 뿐,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인 채, 주변 인연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온갖 욕심 욕망을 벗어던지고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달은 뒤, 세상의 모든 업연을 훌훌 벗어 던지고, 인생이란 긴긴 여정을 운전해 감에 있어, 브레이크와 액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심령 가난한 자들로 넘쳐나는 음양화평(陰陽和平)의 아름다운 지구촌이 도래하길!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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