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틀 장맛비처럼 폭우가 쏟아지고 난 후 비가 그친 하늘은 맑고, 푸르고, 높다.
가을이 돌아왔다. 정말 다행이다. 더 이상 무더위와 씨름할 일은 없을 것 같은, 기대하게 하는 이 선선함이 좋다. 올해는 너무 무더워서 그런지 사람뿐만 아니라 꽃들도 수난의 여름을 보냈다. “올여름이 제일 시원할 것입니다.”라고 환경학자나 기후학자들의 경고를 담은 기사들을 보며 두려워졌다. 그럼, 내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돌아올 여름이 무서워 아닐 거라고 주문을 걸듯 고개를 저으며 핑곗거리를 찾는다. 몇 년 전에도 올해 같은 불볕더위로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그랬다. 점점 더 더워질 거라고.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 몇 해 동안 견딜만한 여름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때처럼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며 눈부시게 파란 가을하늘을 바라본다.
가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모두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난 후, 불어오는 선들바람과 높고 파란 하늘을 보며 무더위로 고생한 여름의 기억을 지워나갈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의 가을맞이는 언제나 국화꽃 한 다발을 집안에 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며칠 전 올해 가을맞이국화를 주문해 꽃병 가득 꽂아 두었다. 가을은 국화과 꽃들의 계절이다. 우리 꽃밭에도 구절초꽃이 피어나 바람에 하늘하늘하고 국화는 꽃망울을 부풀리는 중이다.
구절초는 단오 무렵에 다섯 마디, 음력 9월 9일이 되면 아홉 마디가 되고 그즈음 약성이 가장 좋아 구절초를 꺾어 약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간장을 보호하고, 눈을 맑게 하며, 머리를 가볍게 하고, 피를 맑게 해서 혈액순환을 돕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모초( 仙母草)라고도 불릴 만큼 구절초는 특히 부인병에 효과가 있어서 약이 귀했던 옛날에는 딸이 시집갈 때 구절초를 말려 싸서 보냈다고 한다. 꽃말도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이다.
동글동글 구슬 같은 꽃을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작년 가을 구절초꽃을 따서 차를 덖으며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꽃도 아름답고, 향기도 좋은 구절초꽃으로 차를 덖는 일은 녹록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고유의 쓴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감초 우린 물에 살청을 하고, 꽃잎이 부서지지 않게 동글동글 꽃잎을 오므려 말아야 한다. 구슬처럼 말아놓은 꽃을 고온과 저온을 넘나들며 덖어야 하는 일은 온도와, 시간과 외로운 줄다리기이다. 길고 긴 시간이 버거워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을 마음을 졸이며 따는 일, 그 꽃을 뜨거운 팬에 올리고 온도를 가늠하는 일, 긴 시간 꽃이 지닌 고유의 향과 맛을 지키며 덖는 과정, 이 모든 과정이 내가 수행자도 아닌데 마치 수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꽃을 덖는 일은 그런 일이었다.
동글동글 오므렸던 꽃잎이 활짝 피어나 하늘거린다. 눈으로 즐겼으니 이번에는 들숨으로 향기를 음미한다. 은은한 구절초꽃 알싸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지며 이내 온몸으로 번진다. 아! 정말 좋다. 정말 행복하다. 그리고 느슨해지며 평화롭다.
아마도 이 시간, 이 기분, 이 느낌 때문에 꽃을 덖어 차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일 게다. 마음공부가 별거겠는가. 거창할 이유도, 특별한 의식과, 절차도 굳이 따지지 않고 차 한잔하며 평화로워지는 나를 가만 들여다보면 그게 마음공부이지 않겠는가.
이연 꽃차소믈리에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