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죠?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니 단풍드는 가을이 그려집니다. 생각은 가을이 깊어지는 날을, 그리고 다시 겨울을, 연말을 그리고 있네요. 이렇게 마음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날엔 자꾸 돌아보는 습관이 생깁니다. 여유일까요, 아님 후회일까요, 이 모르는 감정 속에 선생님을 안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는 새삼 깨닫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저는 어딘가 모르게 닮은 모습으로 안부를 묻고 일상을 공유하는 동무가 되었지요.
세상에는 두 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어진 만남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러하고 형제자매 간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혈연의 관계는 치명적으로 운명적이지요.
다른 하나의 만남은 선택한 만남입니다. 진부한 말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이 광대한 우주가운데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할 수 있는 확률 또한 운명이라고 할 밖에요.
오늘 그림책 수업에선 어머니와 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었어요. 『엄마의 초상화』와 『아버지와 딸』 작품을 함께 읽고 나누었답니다. 수강생 평균연령 칠십대 중반의 어르신들이었는데 눈가가 촉촉해지고 먹먹해하는 표정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오래전에 하늘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하다는 한 분은 아홉 남매를 낳아 세분을 잃고 부모님이 고생하신 이야기하실 땐 눈시울이 젖어 그땐 몰랐었노라고, 아버지가 되고나서야 아버지의 자리가 고독하고 힘겨웠다는 것을, 다시 아버지를 만난다면 먼저 말도 걸고 웃겨드리고 싶다는 꿈같은 소망을 말씀하셨어요. 또 한 어르신은 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이제 곧 자신이 하늘나라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끔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는 고백도 들었습니다. 아울러 수강생 모두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다고, 지금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빨리 지나간다고 하셨지요.
우리는 왜 그 자리에 가서야 그 자리의 무게를 알게 되는 걸까요?
저도 이제 중년의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부모님의 마음은 잘 모르겠어요. 제 부모님은 지금도 저를 제 아이들보다 사랑하십니다. 다른 부모님은 손주가 태어나면 손주를 더 예뻐하신 다는데 저희 아빠는 제 아이들이 어릴 적에 세워놓으시곤 “얘가 내 딸인데 너희들 내 딸 힘들게 하면 나한테 혼난다. 내가 얘 아빠야” 하시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제 말을 잘 들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참 위로가 되었어요.
제게도 손주가 생긴다면 아빠처럼 말할 수 있을까요?
성급하게 가을을 그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꼼꼼하게 지난여름 무엇을 하고 무엇을 잃었는지 먼저 살피고 가을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급함이란 시간을 앞당기려하는 욕망이고 태만함은 시간을 느리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했던 가요,
생의 어느 한 여름을 잘 보냈다고 고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급하지도 태만하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기위해 제겐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도 결국 아련한 눈빛으로 부모님을 기억하고 보고 싶어 할 날이 오겠지요. 시간은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우리를 스칠 뿐이고 찰나의 환희나 기쁨만이 사진으로 남아 기억에 각인될 테지만 모든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고 싶어요. 벚나무에 단풍이 막 떨어지려 합니다. 좀 더 가을이 익을 즘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뵈어요. 강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