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
수작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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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의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歲暮)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번 모이되…”

추석, 가족들은 오랜만에 모인다. 친밀한 분위기의 가정들이야 자주 만나 정을 도모하겠지만, 설, 추석 두 번의 명절 모이기도 바쁜 가정도 있다. 친구나 지인들은 어떤가? 월간 모임, 격주 모임, 연간 모임 등 정기적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모임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가끔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모이기도 한다.

살구꽃, 복숭아꽃 처음 필 때, 참외 익을 때, 초가을 서늘할 때 연꽃 보러 갈 때, 국화 필 때, 겨울 큰 눈 내리면, 연말 집 안 화분 매화가 꽃을 피우면 모이는 모임은 대체 어떤 것일까?

초가을 서늘할 때 연꽃 보러 모이자 한다고 하자. 서늘하다는 건 일기 예보에 낮 최고 온도 섭씨 22도인거야 하고 정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느끼기에 이 정도 서늘함이면 될까 하고 길을 나섰더니 아니면 어쩌나… 또 내 딴엔 큰 눈이라 생각하고 갔더니 적설량이 적어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 등등. 현재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모임 약속이다.

살구꽃, 복사꽃, 참외, 연꽃, 국화, 눈, 매화 등 모임을 하는 주제 역시 한가하기 짝이 없다. 이런 한가한 주제로 낭만적인 모임을 갖는 이는 대체 누굴까?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의 집은 명례방, 지금의 명동에 있었는데 명동이 어떤 곳이었겠나? 다산 시문집에 따르면 명례방에는 높은 벼슬아치와 세력 있는 집안들이 많아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날마다 한길을 서로 달리는 곳이었다. 다산은 그런 곳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감상할 만한 연못이나 정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고, 뜨락을 반 정도 할애해 경계를 정하고 꽃과 과일나무를 심었다. 그리하니 고요한 숲과 정원이 되어 시끄러운 소리가 넘어오지 않는다 하였다.

다산은 대나무 중 서까래처럼 굵은 것을 구하여 화단의 동북쪽을 가로질러 난간을 세워 지나다니는 이들이 꽃을 스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죽란(竹欄) 즉 대나무 난간이라는 뜻의 집 이름이 정해졌다. 그리고 낭만적인 모임의 이름 역시 대나무 난간을 따서 죽란시사(竹欄詩社)라 정했다.

오늘날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이는`수작(酬酢)'은 원래 주인과 손님이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수(酬)는 주인이 손님에게 잔을 올리는 것이고, 손님이 주인에게 잔을 다시 드리는 것이 작(酢)이다. 선비들에게 수작은 단지 술잔을 주고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퇴계는 수작을 공부와 유사한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긴수작(緊酬酌)과 한수작(閒酬酌)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것을 중시 여겼다. 여기서 긴수작은 자기 몸과 마음에 긴요한 것 즉 자기 공부에 해당한다면 한수작은 남이나 다른 사물과 관계되는 것들이다. 철학과 같은 공부는 긴수작에 속하지만, 시문이나 예술, 다산의 죽란시사는 한수작에 속한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균형 있게 발달한 전인이 바로 긴수작과 한수작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절에 모인 가족들은 저마다 갈 곳,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상의 삶에서도 긴수작, 한수작이 있다. 마음을 다해 이뤄야 할 각자의 직업과 사명, 자기 공부의 영역, 긴수작이 있다. 삶이 풍요로우려면 그 속에서도 한수작을 찾는 여유가 필요하다. 당겨진 고무줄이 고무의 탄성을 먼저 잃어버리듯 한수작 없이 긴수작에 열중하다 보면 사람의 본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멀리서 찾지 말자. 한수작은 출퇴근길에 피어있는 벌개미취 속에도, 점심 먹으러 들른 식당에 켜둔 라디오 속에도, 문득 올려다본 높아진 하늘에도 있다. 한수작은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의미가 깊어진다. 오늘 옆 사람에게 가을맞이 우아한 수작 한번 걸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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