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날 뻔했다.
내 조상 중에 누군가가 혹시 노비의 신분은 아니었는지 갑자기 가슴이 아릿해 왔다.
그토록 좋아하는 송편이 노비의 떡이라니, 떡박물관 해설사의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동안 몰랐던 송편의 유래에 대해 두 귀를 세우고는 열심히 들어야 했다.
왜 하필 노비의 떡이라 칭했을까. 엄격한 반상의 구별이 있었다지만 떡에서조차 신분의 차이를 두어야 했을까.
그저 그 시기에 합당한 재료를 거두어 양을 늘리고 빚기 쉬운 방법으로 노비들에게 먹여야 했던 떡인 만큼 상전들의 자세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두툼한 모양 속에 들어 있는 소가 맛있어도 노비들의 일상들이 자꾸 떠오르는 거였다. 그 떡을 먹으며 자신들의 삶에 대해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그때는 노비의 날이 있었다 한다.
한해 농사를 짊어질 일꾼들에게 사기를 충전키 위해 음식을 대접하며 떡을 빚어 이웃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분명 좋은 풍습이건만 왜 그렇게 안쓰러운 기분이 든단 말인가.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정말 노비라도 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약한 자들에게 쓰이는 마음 탓일까. 자꾸만 떡의 모양에서부터 담겨있는 유래가 머릿속을 흔들고 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절 속에 살고 있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흘러가는 현실을 엿보게 된다.
문득 떡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것을 통해 삶과 상통하는 과정이 떠오르는 거였다. 떡이 되기 위해 알곡은 가루가 되어야 하고 뜨겁게 익어야 하고 어찌 보면 신성한 순례가 아닌가 싶다.
우리네 삶도 떡이 빚어지는 행로와 마찬가지이다. 혈기 왕성한 젊음의 시절은 볕에 익어가는 알곡이었으리라.
추수 마당에 모여서 창고로 거두어들이고 떡이 되기 위해 가루가 되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믿는다.
그것이 완만한 삶의 정점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디쯤 다다라 있는지 생각해 본다.
가루가 되어 있을까, 반죽이 되어 있을까, 아니면 시루에서 익어가는 중일까.
떡에 대한 신성함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갖가지 종류와 담겨있는 의미까지도 궁금증과 동시에 소중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었다. 화합과 소통, 그 밖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사람의 마음을 가지런하게 해주는 고유한 음식이라는 사실이다. 하나가 되도록 하고 어떤 율례까지 지니는 떡의 속성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이제 스스로 노비의 떡이기를 자처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좋아했던 만큼 즐기면서 지나온 삶을 위로라도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인생을 다시 들여다본다.
비유컨대 떡의 깊은 맛을 위하여 정성스레 빚고 뜸 들이듯 후회 없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