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로 의정이 충돌하며 노환규 전 의사협회장은 SNS에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
“의사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이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발상이고, 문제는 그 재앙적 결과가 국민의 몫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반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한치도 빗나가지않은 현실이 됐다. 의료개혁을 지상과제로 꼽고 강경 노선을 걷던 정부는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초래된 재앙을 국민만 겪고있다.
“의대 증원은 마무리됐다”는 지난달 29일 대통령의 단언은 불과 1주일만에 `원점 재검토'로 후퇴했다. “응급의료센터 99%가 24시간 정상 운영되고 있다”며 대통령과 박자를 맞췄던 보건복지부 차관도 “상황을 엄중히 보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대통령과 정부가 사태 파악을 못했거나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이 쇄도하고, 현장의 위중한 실상이 속속 드러나며 물러섰다. 군의관의 응급실 투입 등 고육책까지 무위로 돌아가며 더 이상 치킨게임을 밀어붙일 동력도 떨어졌다.
대통령실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안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쌍수 들어 환영한 것도 출구전략을 모색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봉착했음을 자인한 장면으로 읽힌다. 대통령실은 “의료계가 합리적 안을 제시하면 언제든 제로베이스에서 논의하겠다”고 했다. 어제 한 언론을 통해서도 “의료계가 2026학년도 의대 `0명 증원안'을 제시해도 논의 가능하다”며 의사들의 대화 복귀를 촉구했다. 민주당도 협의체 가동에 적극 동의하고 나서 많은 국민이 해법을 찾을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됐다.
하지만 협의체의 핵심 축인 의사들을 테이블로 불러내기가 쉽지않아 보인다. 의사단체들은 대통령 사과와 보건복지부 장·차관의 파면에 2025학년도 증원 방침까지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25학년도 증원은 이미 진척된 학사 일정상 변경할 수 없다고 정부가 못을 박은 사안이다. 백기 투항으로 비쳐질 대통령 사과도 성사될 가능성이 낮다. 생명을 위협받는 환자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될 협의체 출범이 오로지 의사들의 결단에 달렸다는 얘기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구호가 구현된 시점이자 지점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정부에 가해지는 비판에서 의사들은 자유로운 걸까?
지금 벌어지는 의료대란은 정부와 의사단체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양보없는 치킨게임에 올인한 결과다.
정부는 `2000명 증원', 의사들은 `원점 재검토'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대치했다. 정부의 일방적이고 과도한 증원정책과 거친 추진방식에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단 한명의 증원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외고집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몫이 될 재앙적 결과'를 스스로 예견했던 의사단체가 그 재앙을 막기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의정갈등의 직접 당사자인 의사들이 위기 상황을 관망하는 객체가 돼버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군의관과 공중보건의를 응급실에 파견키로 한 정부 방침에 대한 의사협회의 논평을 보면 이런 감을 지울 수 없다.
의협은 “군 의료를 책임지는 군의관들이 복무중인 부대를 떠나고, 농어촌 등 의료취약지에서 근무하는 공보의가 근무지를 떠나면 그 공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역의료를 살린다는 정부가 오히려 지역의료를 말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 의료망이 총체적 공백에 빠져 환자가 응급실을 돌다 목숨을 잃는 마당에 군부대와 농어촌의 의료 공백을 운운하는 현실인식도 한가롭지만 안타까움이 묻어있지 않은 담담한 훈수에선 비정함도 느껴진다
여론은 여전히 의대 증원에 기울어 있다. 정부의 추진 방식과 안일한 상황 대응에 분개할 뿐이다.
대통령실과 정부가 원점 재검토를 공언하고 의료 상황이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긴박한 만큼 의사들은 공론장에 나와 왜 증원이 불필요한 지 국민을 설득하기 바란다.
`국민은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말까지 듣고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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