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본다. 처음으로 생긴 우리 집이었다. 어디 한군데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곳곳에 스며있는 가족의 숨결이 느껴진다. 여기서 함께 호흡하며 산 3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내 인생의 반을 보낸 이곳을 떠날 생각에 마음이 아릿하다. 치달은 눈물이 바닥에 뚝 떨어진다. 정을 떼라는 소리인 게다. 이제 이사 갈 날도 일주일 밖에 남질 않았다.
나에게 집이란 내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장소다. 밖에서 아프고 힘든 일을 겪으면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곳이고, 남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다음 날에 또 부딪힐 힘을 얻는 곳이다. 혼자 있어도 심심함을 모른 채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편한 공간이다. 나를 어루만져주고 품어주는 포근한 엄마 같은 넉넉한 품이다.
이 집은 남의 집을 떠돌다 정착하게 된 기쁨이었다. 여기서 아들을 키워 청년이 되었고 우리 부부는 청년과 중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 지금은 장년의 막바지를 보내고 있다. 나의 하루하루를 지켜보았을,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을 나눈 보금자리였다. 나에게, 아들에게, 그이에게도 안식처가 되어 준 긴 세월이 담긴 곳이다. 꽤 정들은 집이다.
여기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는 기쁨과 나도 꿈같은 수필가가 되어 수필집도 냈다. 그이가 사업을 시작했고 번창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삶이 즐겁고 행복도 차올랐다. 인생이 단맛 뒤에 오는 쓴맛이 잔인하다는 것을 안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픔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젊었을 때는 몰랐던 건강의 소중함을 사무치게 알아가는 중이다.
집도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다. 게으름을 피울 때는 내가 아프다는 것임을. 여간 꾀병을 모르는 내가 꾀병을 부릴 때는 너무 피곤하고 지친 날임을. 어쩌다 가끔 꽃을 사서 들어오는 날에는 무척이나 우울하다는 증거임을 알고 있었을 테다. 그래도 말없이 품어준 이 집을 떠나는 서운함에 시큰하다.
서서히 짐을 정리한다. 먼지 덮인 책을 추려서 버린다. 마음으로 건네받은 책을 읽지도 않고 꽂아놓은 책들을 보며 미안해진다. 한두 해 입지 않은 옷들은 미련을 두지 말고 버려야 하건만 몇 해 동안 옷장에서 쉬고 있다. 이번에는 과감히 쓰레기봉투에 던져 버린다. 그래야 새집에 대한 대접일 듯싶다.
이사를 해야만 확실히 집안 정리가 된다. 사람이 사는데 무어가 그리 많은 게 필요한지. 쓸데없이 쌓아둔 물건들로 짐은 날로 늘어만 간다. 정을 떼는 일은 사람하고만 힘든 줄 알았다. 물건도 예외는 아니다. 이럴 때마다 버리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게 된다. 이때뿐이지 뉘우치면서도 실천이 잘 안 된다. 요즘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나에게는 절실하다.
집은 매일 내 손길 하나하나가 스쳐 간다. 내가 부지런하면 반짝반짝 윤이 나고 내가 게으름을 피우면 금방 표시가 난다. 나로 인해 좌우되는 집. 이제 새집에 대한 꿈을 꾸려 한다. 가구도 가전도 다 새것인 공간에서 새로운 정을 들이리라. 하나하나 집을 가꾸면서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날 우리 집을 상상해 본다.
탁 트인 밖을 보며 모닝커피 한 잔을 할 테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에 맡기고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리라. 부디 숨이 턱에 닿는 지금의 깔딱고개를 넘어서서 앞으로 이사 갈 집에서 누릴 기쁨을 갈구하고 있다. 간간절절한 낮은 이의 기도가 부처님 앞에 향을 피워 올린다. 이별의 긴 꼬리가 연기를 타고 떠난다. 나의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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