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카레이스키, 애니깽, 고려인, 재일 동포. 한민족이지만 대한민국에 살지 않고 타국에서 사는 우리 동포들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지역별로 국가별로 각양각색이다. 우리 민족은 무관심 속에 일정한 호칭도 없이 머나먼 타국에서 살아야만 했고 지금도 살고 있다.
우리 민족이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하게 된 것이 고려 시대부터라고 한다. 이런 연유로 중앙아시아에서는 보통 한민족을, 역사적으로 유대가 깊은 `고려'를 음차한 `Korea(corea)'의 러시아식 형용사형 표현인 `카레이스키'라고 그들은 부르고 우리는 `고려인'이라 부른다.
연해주는 우리와 아주 특별한 연관이 있는 지역이다. 한반도와 접경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 이외에 역사적으로 우리 한민족의 영광과 회한이 배 있는 곳이다. 그 옛날부터 연해주는 우리 한민족의 생활권이었다. 부여, 북옥저,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하에 우리 민족문화가 꽃을 피운 영역이다. 연해주 최남단에 위치한 조선의 옛 영토인 녹둔도는 조산만호로 재직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둔전제를 실시하던 곳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한민족과 청의 땅이던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로 넘겨진 이후에도 그곳에 거주하며 조선인으로 남아 있었다.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사회주의 건설, 대기근 발생, 일제의 만주국 설립 등 국내외의 정세로 탄압의 시대였다. 1937년 봄, 스탈린의 반제숙청작업으로 고려인의 강제 이주가 시작된다. 소련은 국경부근에서 일본군과 충돌이 빈번해지자 “일본첩자 침투방지”란 이유로 고려인 강제이주를 비밀리에 실행한다. 일제에 대항해 싸워온 고려인을 일제의 앞잡이로 몬 것은 고려인들에게는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고려인 이주민을 태운 첫 수송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 추수를 앞둔 곡식, 자신들 소유의 건물, 가축, 농기구 등 많은 재산을 국가에 넘겨주고 가축을 싣는 화차인 `바곤차'를 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이주민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3~4주를 시베리아 횡단 열차 속에서 시달렸다.
9월 초에서 12월 말까지 수송된 인원이 18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과 소련의 적대 관계에서 비롯된 강제 이주. 이 틈바귀에서 찢기고 짓밟히고 희생된 것이 `나라 없는 백성' 고려인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당시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해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던 곳이다. 고려인들은 건조한 반사막지대와 스산한 갈대밭에 정착했다.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으로 제정러시아 때는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탄압받은 민족들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은 소수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중앙아시아에서의 민족주의 성행은 수많은 신생 독립국을 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받은 또 다른 차별로 인한 고단한 삶을 추스르고자 고려인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한 맺힌 눈물을 흘리며 떠난 곳인 연해주로 모였다. 그러기에 작가 김호준은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김호준/주류성>에서 연해주를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현대판 디아스포라'인 고려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라 말하는 이유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도 있다. 대략 8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들은 안산 뗏골 마을, 서울 광희동 고려인촌, 광주광역시 산정동 고려인 마을 등지에서 정착해 살고 있다. 한민족으로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나 외국인 노동자로 고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 언어, 가치관, 이념, 전통 등 한인과는 사뭇 다른 중앙아시아적인 그들, 그러나 눈 모양과 식습관은 한국적인 그들, 고려인! 혹자는 고려인을 20세기에 탄생한 `신종 유라시아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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