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났다. 아무리 찜통더위라 해도 처서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웬걸! 한낮 더위는 그대로가 아닌가. 아니다. 절기 앞에 불볕더위도 조금은 밀려났는지 아침저녁으로는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견딜 만한 걸 보면 덜 덥긴 한가 보다.
차를 우린다. 꽃을 소재로 글을 쓰기 전에 갖춰야 하는 의식처럼 글의 주인공이 될 꽃을 우려 노트북 옆에 놓아둔다. 글을 써내려 가다 막히면 입으로 한 모금 마시며 생각하고, 눈으로 유리 다관에서 다시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새싹이 돋아 자라나고, 꽃으로 피어나 차로 덖어져 내 찻잔에 담길 때까지의 여정을 떠올린다. 이번에는 마리골드(marigold)꽃이다. 흔히 `메리골드'라 불리는 꽃이다.
쉬어家를 들어서면 밭과 마당의 경계에 마리골드만 심은 꽃밭이 있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고 지고 하여 마당을 들어설 때마다 눈을 즐겁게 해준다. 서광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향기가 진하고 매우 독특하다. 그 독특한 향기를 뱀이 싫어한다고 하여 시골마당 곳곳에 간택되어 심는 꽃이다. 나도 누군가의 그 말을 믿고 농막 이곳저곳에 심은 꽃이기도 하다.
어느 날, 농막에서 마리골드 꽃밭 사이로 소 닭 보듯 유유히 지나가는 뱀을 보며 속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꽃들과 달리 진딧물과 벌레들의 습격은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뱀이 나타나는 것을 막아보려 여기저기 심었던 꽃을, 지금은 꽃차로 만들 생각으로 심어 가꾸고 있으니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싶어 웃음이 나온다.
내가 마리골드만 심어 꽃밭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 때문이다.
행복이 반드시 온다니 이 얼마나 희망적이고 긍정적인가.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을 꽃말로 품은 마리골드는 성분도 효능도 다양하다. 눈에 좋은 루테인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은 꽃에 별 관심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항산화 작용을 하여 노화 예방에도, 목감기에도, 피부미용에도, 면역력 강화에도 효과가 있다.
올여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불볕더위에 만사가 귀찮아지는 나날이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마리골드꽃이 만발인데도 뜨거운 팬 앞에서 꽃차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만수국이라 불릴 만큼 늦은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는 꽃을 피우니 날이 선선해질 때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손수 가꾼 꽃으로 차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눔을 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은 꽃차의 가치를 몰라줄 때면 서운하기도 하지만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한 송이꽃이 꽃차로 재탄생되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손길과 정성이 들어간다는 것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다행히 귀하게 여겨 꽃차를 우려 마셔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내 욕심일 뿐이다.
빠르고 편한 것, 자극적인 것에 길 드려진 입맛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처음부터 꽃차가 입맛에 당겼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려니 한다.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듯 스며들 듯 꽃차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내게 나눔을 받는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내 바람일 뿐이다.
날이 좀 더 선선해지고 가을바람에 꽃의 향기가 깊어지면 그 꽃으로 차를 덖으리라.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고 꽃말을 써서 지인들에게 건네주며 꽃차를 받은 이들이 나처럼 꽃차에 스며들어 행복해지기를 바랄 것이다.
시간의 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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