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뿔은 다 나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입추가 지나서도 한낮엔 여전히 폭염으로 절망스럽지만 이른 아침엔 코끝에 느껴지는 가을 냄새가 좋습니다.
가을 냄새가 나면 늘 80년대 후반 여고생의 저를 소환합니다. 여름 끝에 올라오는 가을 냄새는 사춘기 감성을 자극해 친구들은 늦여름을 만끽하고 있을 때 혼자 가을 속으로 걸어갔지요. 아무리 작렬했던 햇빛도 엽록소가 빠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조금씩 떨어지는 잎 앞엔 속수무책이지요. 가벼워지고, 비워지고 날것의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의식처럼 가을은 그렇게 소리 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일 새벽엔 자잘한 가을이 얼마나 깔려있을까 아파트 공원을 상상합니다.
언제인가부터 무용(無用)한 것에 대한 애정이 생겼답니다. 특히 쓸데없이 예쁜 하늘, 쓸데없이 정교하게 핀 여름 들꽃들을 보고 있자면 무한 충만으로 `돈도 명예도 사랑도 싫다 싫어' 이런 쓸데없이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시에 오래 살다보니 자주 흙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정작 요즘 유행하는 맨발 걷기도 꺼림직해 양말 한번 벗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늘 이렇게 방어하고 조심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 우리의 모든 뇌 작동은 구석기 시대에 맞춰진 채로 발전해왔다고 합니다. 저의 피곤함은 아마도 구석기 조상이 보던 초록한 세상을 매일 보지 못해 생기는 피로감이 아닌 가해요.
구석기 시대 어른들이 사냥을 하고 극도의 긴장감을 불멍을 하며 치유했다면 저는 도시의 회색 긴장을 폰멍으로 영혼을 달래느라 늘 잠을 설치곤 합니다.
선생님의 도시 삶이 어떠신가요, 저도 선생님처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도 고요하고 반듯한 직립보행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부서질 일만 있을 것 같은 도시에서 꼿꼿하게 산다는 것은 오히려 도시처럼 굳어가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제 와서 유연해져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얼마 전, 성경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능력을 주실 때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고 다시 지팡이로 돌아오게 하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성화에 나타난 모세의 지팡이는 늠름하고 길고 곧은 것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모세의 지팡이는 지휘봉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엔 신라시대부터 임금이 나이 든 신하에게 궤장(?杖)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엔 이걸 기념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지요. 현대에는 100세가 되는 노인께 청려장(靑藜杖)을 드린다고 합니다. 지팡이 중엔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가 으뜸이라고 하지요. 검색해보니 역시 명아주 지팡이도 모세의 것처럼 생각보다 작고 가벼워 보였습니다.
유연해져야 한다면, 제 육체에 붙은 다리 외에 영적이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깎여지지 않은 모난 성질머리를 지팡이에 기대어 등이 조금 굽고 허리가 펴지지 않는 다고해도 좋습니다. 허리를 숙여 땅에 자라나는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을 테지요. 하늘은 가끔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고 낮고 보이지 않는 것을 애써 찾을 때, 그때 유연해지지 않을까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이렇게 훈련하다보면 언젠간 저도 무용한 것이 되어 누군가에게 미소를 짓게 하는 한 여름의 들꽃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이라는 시간은 늦은 감이 있지요. 고요하고 반듯한 성품은 이런 유연함을 내피에 깔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때문입니다. 곧 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