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방학쯤, 교육지원청에서 특별 나눔 프로젝트 `조선족 소학교 돕기 활동'을 기획했고, 나는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에게까지 참가 기회가 올 리 만무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참가 인원에서 1명의 여유가 생겨 내가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연변으로의 길이 열렸고, 나는 생애 최초 해외여행 길에 올랐다. 16년 전의 연변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여러 조선족 소학교를 방문하며, 준비해 간 물품과 성금을 전달하였다. 만나는 학교마다, 그 열악함에 놀랐지만, 조선족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의 열망은 매우 뜨거워 마음을 울리는 진한 감동으로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흙바닥의 교실들, 비루한 책걸상들 그리고 아이들, 아이들의 부모들까지 모두가 같은 민족임에도 뿔뿔이 흩어져 머나먼 이국땅에서 뿌리내려야 했던 시대의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동포의 한마음을 깊이 나누고, 서시의 주인공을 찾아뵈러 길을 나섰다. 하늘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으로 가슴 아파하셨던, 그분을 찾아뵐 수 있다니? 가슴 아프면서도 설레는 발걸음으로 하늘과 바람과 시, 슬픈 천명의 시인을 다 같이 만나 뵙고, 시대와 조국을 아파했던 한 청년의 터전을 보고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일송정 푸른 솔이 있을 그 언덕에서 선구자 노래를 같이 부르며 눈시울이 붉어졌던 우리 일행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무엇으로 시인의 마음을 이어갈꼬~ 연변에서 시작된 일정은 백두산 천지를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하얼빈에 당도했다. 하얼빈~이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얼빈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고 심장은 터질 듯하다. 99년 전의 그날, 무엇이 그분을 이곳까지 오게 하였을까? 어떻게 그 순간을 그리 걸어가실 수 있었을까? 그분의 존재만으로도 경이로울 뿐이다. `경이롭고, 위대하셨던 당신들을 만나러 왔지만, 이것뿐이에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이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하얼빈역을 혼자 거닐며 속삭이듯이, 대화 나누듯 읊조린다.
역사 속으로 걸어가듯, 그해 여름 하얼빈에서의 마지막 밤이 나를 불러준 것 같았다. 그 후 십 년이 지나, 10월 바람이 보드라울 때 네덜란드로 향했다. (두 번째 해외여행) 함께 간 이들과 암스테르담 곳곳을 거닐고, 마지막 일정을 헤이그로 정했다. 네덜란드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헤이그였기 때문이다. 헤이그행 2층 열차는 연인을 만나러 가듯이 그렇게 달려 주었다. 헤이그역을 나와 걷다 보니 한글로 쓰인 기념관을 만난다. 여기다. 적잖은 우리 일행은 기념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찾아본다. 열사님도, 또 다른 특사들도 이곳에서 겪었을 그때 그날의 이야기들이 가슴을 울린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는데, 내 뒤에 누가 와서 앉는다. 커다란 배낭을 멘 한국 청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 본가 근처 대학의 4학년 학생이라는 말에 언제고 알고 지내던 이웃처럼 더 반가웠다. 일행들은 홀로 배낭여행을 와 헤이그까지 온 그는 대단한 청년이라며 칭찬의 말을 이어갔다. 반갑고 정겨운 사람들~ 이 머나먼 타국 땅, 헤이그에서 만난 우리가 그랬다. 열사님은 어떠하셨을까?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땅을 떠나 이곳에 왔을 때, 가슴에 품을 뜻 풀어보려 해도 막히고 엉켜버린 그때의 시간을 어찌할 수 있으셨겠는가? 그날 헤이그에 불던 바람도 오늘과 같았을까? 우리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110년 전 조선의 영웅을 만나고, 고국의 한 청년을 만났다.
이렇게 조국의 영웅들을 만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그 힘은 내 안에 평화를 이루고,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를 이뤄가며 살아가게 해준다. 오랜 영웅들의 바람이 내 곁을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