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의 마술
도라지꽃의 마술
  • 이연 꽃차소믈리에
  • 승인 2024.08.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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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이연 꽃차소믈리에
이연 꽃차소믈리에

 

습하고 무더운 나날들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고 숨이 턱에 차듯 가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평소 소신이기는 해도 올여름 더위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편히 즐길 수 없는 불볕더위다.

휴가 중이다. 휴가라고 해야 도무지 어디 여행 갈 엄두도 나지 않아 쉬어家에서 보내고 있다. 동트기 전에는 풀과 씨름하고, 한낮에는 에어컨을 켜놓고 뒹굴뒹굴하며 휴가를 즐기고 있다.

꽃차(茶)를 함께 배운 지인들이 놀러 왔다. 배운 도둑질은 어쩔 수 없다더니 M언니가 도라지꽃을 가지고 왔다.

3일 동안, 이 무더위에 밭을 오르내리며 꽃을 따서 모았다고 한다. 땀을 흘리며 꽃을 채취했을 언니의 마음이 향기롭게 가슴에 닿는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꽃을 손질했다.

통꽃인 꽃잎을 생김대로 가르고, 꽃술을 제거해 다듬어 놓고 보니 보라색 꽃잎이 아름답다.

손질까지 해주고 돌아간 지인들의 정성이 고마워 덖음을 시작했다. 낮은 온도의 팬에 꽃들을 나란히 올리고 집게로 뒤집어 가며 덖는 일은 시간과의 줄다리기이다.

한 잎, 한 잎 바스러질까 조심조심하며 꽃잎을 다루는 모습은 평소의 내가 아니다. 오랫동안 가게에서 시간에 쫓기듯 일하다 보니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일에는 서투르고 실수를 종종 하기도 한다. 비교적 다루기 쉬운 잎 차는 견딜만했으나 여린 꽃으로 차를 덖을 때는 급한 성미와 거친 손놀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꽃차를 배우며 중도에 포기할까 고민했다.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 차가 도라지 꽃차다.

처음 도라지 꽃차를 유리 다관에 넣고 차우림을 했을 때 그 감동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투명한 유리 다관에 고요한 푸른 바다가 있었다. 보라색 꽃이라 우림 색도 분명 같은 색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보라색은 어디로 숨어버리고 고요한 푸른 바다가 다관 안에 나타났다. 사파이어 같기도, 터키석 같기도 한, 그 오묘한 빛을 바라보며 자연이 표현하는 색은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동해 어느 한적하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내가 평소에도 동해를 너무 좋아해서 일 수도 있겠다. 레몬즙 서너 방울 떨어트린다. 푸른 바다는 내가 언제 푸른색이었냐는 듯 새침하게 자수정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렇게 도라지 꽃차의 신비한 마술을 보며 어찌 꽃차 배우기를 포기하겠는가.

도라지의 한약명은 길경이다. 굳이 세세히 설명할 필요 없이 도라지가 약재로도, 식재료로도 사람 몸에 여러모로 좋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기관지나 폐 질환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생각하는 도라지의 가장 큰 장점은 꽃차로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먼저 눈으로 즐기고, 향으로 즐기고, 마음으로 즐겨라.”

이 얼마나 멋진 꽃차인가. 도라지 꽃차는 차게 마셔도 따듯하게 마셔도 무난하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사이다에 얼음을 띄우고 시원하게 마시는 것도 상쾌하고 본연의 차 맛을 즐기려면 따듯하게 마셔도 향기롭다.

지금부터 눈을 감고 상상을 해 보시라. 유리 다관에 도라지 꽃차를 몇 송이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잠시 후 눈을 떠 보면 고요한 푸른 바다가 펼쳐지리라. 푸른 바다에 레몬즙 서너 방울도 뿌려보시라. 푸른 바다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 기회가 되면 꼭 도라지 꽃차를 우려보시라. 누구든지 꽃차 마술사가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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