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최석정 선생
주화파 거두 조부 최명길 영향 양명학 경도 … 역학·수학 위업
정치·행정가로 민생해결 앞장 조선중기 주류 성리학 벗어나
수구세력 사문난적 취급 공격 노론 송시열 만동묘 완벽 복원
소론 최석정 초라한 무덤 대조 학자·정치·행정가 숱한 업적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기록無 후손 최종형옹 등 노력 결실
2010년대 들어서야 재조명 정부 `올해의 최석정 상' 제정
청주시는 묘소 정비계획 마련 사학계 역사바로세우기 여론
#최명길과 최석정 … 송시열과 대를 이은 원한(?)
새롭게 평가되는 명곡 최석정 선생은 요즘 표현으로 `융·복합 인재'다.
26세에 관직에 올라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영의정만 8번을 역임했다. 관직 경륜만으로 전형적인 엘리트 정치인이요 관료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삶에서도 역학과 수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세계 최초로 마방진을 창안하는 등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학자들은 이를 동양철학에 기반을 두고 서양 수학을 정리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를 조선시대 최고의 `융합인재'로 부르는 이유다.
선생의 학문은 조선 사회를 지배한 노론의 경직된 주자 성리학에서 벗어나 양명학에 경도됐다.
이는 조부인 지천 최명길 선생으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노론의 거센 공격을 받는 이유가 됐다.
선생의 11대 손 최종형옹(87·청주시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은 “석정 할아버지의 학문은 외주내양(外朱內陽)의 탈 주자학풍을 보였던 조부 최명길 할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지천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노론의 거센 반대에도 인조에게 항복을 권한 주화파 문신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이병헌이 분(扮)해 열연한 역이 최명길이다.
“그대는 찢으시오. 나는 붙일 것이요.” 영화 속 이병헌의 명대사다.
척화파 김상헌이 항복 국서를 찢자 최명길이 한 말이다. 역사에도 그대로 기록돼 있다.
최명길 선생의 묘소도 북이면 대율리에 있다. 손자 최석정 선생 묘소와 400여m 떨어진 곳이다. 최명길은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제자였다. 먼저 벼슬길에 오른 최명길은 송시열을 벼슬길에 천거했다. 이렇게 맺어진 송시열과의 인연은 후대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인연은 악연으로 바뀌었다.
최석정은 을병대기근 당시 청의 강희제로부터 5만석의 쌀을 구해와 파탄에 빠진 조선을 구한다. 하지만 당시 존재하지도 않던 명나라에 대한 대의에 사로잡힌 노론은 구휼미를 `오랑캐 쌀'이라 폄훼하며 최석정을 공격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론의 송무원이다. 송무원은 송시열의 증손자다.
을병대기근 이후인 1704년 숙종이 창덕궁 대보단에서 명 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내려는데 영의정 최석정이 참석하는 것에 송무원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청나라 쌀로 기근을 모면한 노론이 오랑캐 쌀이라 부르며 최석정을 탄핵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초라한 무덤과 완벽하게 복원된 화양동 만동묘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는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노론 영수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제자인 권상하(1641~1721)가 유생들과 함께 건립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명의 만력제와 숭정제를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하지만 “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당시 노랫말처럼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등 서원 폐단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결국 만동묘는 고종 때 철폐됐다. 이후 유허지로만 남아있던 만동묘는 지난 2001년 이후 모두 완벽하게 복원됐다.
노론의 지탄을 받아온 최명길과 손자 최석정의 묘가 있는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야산.
400여m 거리의 두 묘소는 마치 무명씨의 무덤처럼 무성히 자란 잡초더미에 묻혀 있다.
묘소로 향하는 이정표는 글씨까지 훼손된 상태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수풀이 우거져 찾기조차 쉽지 않다. 한 눈에도 방치되고 있음이 실감된다.
최종형옹은 “조선 중기를 지배해온 성리학의 노론 수구세력에게 현실 성향의 최석정 선생은 영의정을 8번이나 지낸 정치가라기 보다 가학(양명학)이나 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었을 것”이라며 “강자 논리로 흘러가는 역사의 희생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후대들어 본모습으로 복원된 노론 송시열의 만동묘. 309년 동안 후대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온 소론 최석정 선생의 초라한 무덤. 역사에는 이렇게 늘 모순된 일이 비일비재하다.
#“최석정 선생을 역사교과서에 기록하자”
세계 최초로 마방진을 창안한 조선의 수학자. 영의정을 8번 역임하며 수백만명이 굶어 죽던 대기근에서 조선의 백성을 구한 명곡 최석정 선생.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최석정 선생의 기록은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충북(진천) 출신이고 그의 묘소가 309년째 청주지역에 잠들어 있지만 선생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학계는 물론 향토사학계에서조차 최석정 선생은 관심 밖이었다. 18세기에 그려진 선생의 영정이 지난 2017년 후손들에 의해 청주박물관에 기증된 뒤에야 겨우 보물로 지정됐으니 후대의 무관심을 더 말해 무엇하랴.
선생의 학문과 업적은 오로지 후손인 최종형옹(87)에 의해 간단(簡單)히 연구돼 왔다.
초등교장 출신인 최옹은 퇴직 후 30여 년간 전국을 돌며 문중의 기록과 족보, 비문을 찾고 분석했다. 그 결실로 선생의 발자취가 몇 권의 책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된 역사로 기록하기에 역부족이다.
다행히 지난 2006년 연세대 송홍엽 교수에 의해 `구수략'의 마방진이 세계 최초임이 밝혀지면서 선생에 대한 관심도 달라졌다. 정부는 2013년 선생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제정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2021년부터는 과학과 수학 발전에 공이 큰 학자에게 `올해의 최석정 상'을 시상하고 있다.
청주시도 최근 최석정 선생 묘소 종합정비계획을 마련했다. 문헌과 기초자료 조사를 통해 보존 정비 방안을 마련해 문화유산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덧붙여 지역사회와 학계를 중심으로 최석정 선생에 대한 역사바로세우기 여론이 일고 있다.
선생의 업적과 학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통해 역사교과서에 등재하자는 주장이다.
김근배 전북대 자연과학대학장(63)은 “선생의 과학과 조합 수학분야의 업적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고 의당 역사교과서에도 실려야 마땅하다”며 “지역에서부터 이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 학장은 특히 “공무원이면서 학자이며 수학 과학자였던 선생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극히 제한적이고 지엽적이었다”며 “청주시 등 자치단체에서 학계 조사연구를 적극 지원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명철 향토사학자(63·전 제천교육장)는 “서양의 수학과 동양철학을 접목한 융합적 인재란 측면과 함께 명분을 떠나 민생 해결을 앞세웠던 정치·행정가로서의 선생의 모습은 후대에 반드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로 창간 19년을 맞은 충청타임즈는 이번 창간 특별기획을 통해 `최석정 선생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한 공론화를 지역사회에 제안한다.
/오영근 대표이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