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모욕하는 공영방송 쟁탈전
유권자 모욕하는 공영방송 쟁탈전
  • 권혁두 국장
  • 승인 2024.08.0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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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대통령 직속기구로 출범했다. 방송·통신 정책을 관장하고 지상파방송 허가, 종편·보도채널 승인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백미는 공영방송 임원 선임에 관한 권한이다. KBS 사장은 KBS 이사회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MBC 사장은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가 뽑는다. KBS와 방문진 이사 임명·추천권을 독점한 기구가 바로 방통위다.

문제는 방통위 인사가 정치권력에 맡겨졌다는 점이다. 방통위를 구성하는 5명의 상임위원 중 위원장을 포함한 2명을 대통령이 지명한다. 나머지 3명은 여당이 1명, 야당이 2명을 추천한다. 집권 세력이 3 대2 우위를 누리는 구도다. 야당은 의사 결정에서 들러리에 그칠 뿐인 위원 추천에 소극적이다. 지금 방통위에서 여야 정당 몫인 3명의 위원 없이 대통령이 지명한 기형적 2인 체제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변칙이 벌어지는 이유이다.

이 태생적 결함이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방통위를 접수해 공영방송 이사를 내 편으로 재편한 후, 사장을 하수인으로 교체하는 공식이 되풀이 돼온 근원이다. 정치에 예속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은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 대선 공약이었다. 하지만 문 정부는 집권 후 이 공약을 실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임 정부의 행태를 답습하며 단물을 빨아 먹었다. 집권하던 해 이런저런 구실을 내세워 임기가 남은 KBS 사장을 해임했다. 방통위를 통해 KBS의 전 정권 추천 이사를 찍어내고 여권 다수로 재편한 후 단행한 조치였다. 법원은 지난해 이 해임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정권을 잃어 수세로 몰리자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민간의 다앙한 채널로 확대하자며 방송법 개정안을 강행하는 민주당의 모습이 당당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문 정부의 인위적인 KBS 사장 교체는 윤 정부 들어 고스란히 재연됐다. 지난해 11월 전 정부와 똑같은 수순을 거쳐 KBS 사장이 교체됐다. 새 사장이 취임하기도 전에 KBS의 뉴스·보도·시사프로그램 앵커와 진행자들이 줄줄이 하차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방통위를 놓고 계속되는 여야 각축전이 점입가경이다. 그제 신임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민주당 등 야당이 발의한 탄핵안은 국민의힘이 퇴장한 상태에서 강행됐다. 발의에서 처리까지 딱 이틀이 걸렸다. 이 위원장은 임명장을 받은 지 사흘만에 직무 정지됐다.

야당만 스피드를 과시한 게 아니다. 이 위원장은 임명 당일인 지난달 31일 이사회를 급히 소집해 공영방송 이사 임명을 강행했다. MBC 관리·감독 기구인 방문진 이사 9명 중 여권 몫인 6명을 임명해 사장을 갈아치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들 이사의 임기만료일은 8월 12일이다. 임기가 열흘 이상 남았던 만큼 임명장을 받자마자 인사를 서둘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야밤에 회의를 진행해 신임 이사 임명을 밀어붙인 것은 거대 야당이 탄핵을 추진해 자신의 손발을 묶기 전에 방문진 이사 구성을 진보에서 보수 우위로 돌려놔야 했기 때문이다.

방통위원장 탄핵이 이번 정부들어 벌써 네번째다. 툭하면 위원장 공석의 식물 기구가 돼버린다. 방통위가 설립 취지와 달리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훼손하는 주범으로 전락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지난 5월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올해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해 47위에서 62위로 추락했다. 부끄러운 순위가 방통위의 파행과 무관찮아 보인다.

우리 정치사에서 언론을 장악해 여론을 호도하려는 시도가 성공한 적이 없다. 유권자들을 언론 공작에 휘둘릴 우매한 대상으로 취급하는 오만한 인식이 반감을 부를 뿐이다. 지난달 우원식 국회의장이 사회적 논의기구를 꾸려 합리적인 공영방송 제도를 마련하자고 여야에 제안했다. 여야가 각자의 길을 고수하며 무산됐지만, 이제라도 우 의장이 제안한 논의의 마당을 되살려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쟁탈전에 정치가 낭비되는 악순환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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