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희망의 숫자는 7이다. 7이라는 수는 자연계에서도 중대한 역할을 한다. 달은 초승달로 시작하여 이레가 지나면 반달, 다시 이레가 지나면 보름달, 그리고 다시 이레가 지나면 초승달로 돌아가면서 밤하늘을 밝혀준다. 음악의 음계도 도레미파솔라시도 7 음정이다. 요일도 월화수목금토일로 일곱이다.
성경이 7이라는 수를 쓴 곳은 그야말로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예컨대,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어내신 것이 이렛날이었던 연유로 7일째를 안식일이라 한다. 레위기에는 `칠 년째 되는 해는 땅에 안식을 주라.'고 정하여 칠 년마다 밭을 묵히는 규정이 있다.
예수께서는 일곱 개의 빵을 쪼개어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고 그 부스러기가 일곱 바구니나 남았다. 또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대답하신다. (마태 18, 21-22)
이처럼 성경의 7은 `완성'을 나타낸다. 7은 하느님의 세계인 셋과 자연의 세계인 넷을 합친 `완성'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일곱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사랑의 7가지 봉사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물질적' 봉사에 속하는 일곱 가지는 음식 제공, 식수 제공, 외국인 환대, 의류 제공, 병자방문, 교도소 방문, 장례봉사이고, 사랑의 `정신적' 봉사에 속하는 일곱 가지는 문맹 퇴치, 의심 불식, 낙심한 이들의 위로, 방탕한 삶의 계도, 소외된 이들에 대한 법적 대변, 인권 옹호,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의 7가지 욕망을 극복하는 `칠극 七克'의 길을 가르친다.
교만은 사자의 사나움과 같아 겸손으로 복종시켜야 한다.
질투는 파도가 일어남과 같아 용서로 가라앉혀야 한다.
탐욕은 손에 단단히 쥔 것과 같아서 은혜로 이를 풀어야 한다.
성냄(분노)은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아 인내로 꺼야 한다.
식탐은 골짜기로 받아들임과 같은지라 절제로 이를 막아야 한다.
음란함은 물이 넘치는 것과 같아서 정결함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
나태는 둔마가 지친 것과 같아 부지런함으로 채찍질해야 한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이 결여된 부, 양심이 없는 쾌락,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 도덕성 없는 상거래, 인간성이 사라진 과학, 희생 없는 종교, 인도의 성자 간디가 말한 `7대 사회악'이 난무하는 작금의 세상이다. 고통, 질병, 사건, 사고 등과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일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희망이란 최악의 상황을 언급하기보다는 사람의 좋은 면을 찾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불평하기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문제가 크든 작든 모든 기회로 보는 것, 포기하고 싶을 때 보일 때 믿음으로 나가는 것, 어두움을 저주하기보다는 촛불을 밝히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하여튼 나는 숫자 7을 좋아한다. 현실이 녹녹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무지개 빛 세상을 꿈꾸는 동일한 이유에서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