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채수근 상병이 폭우로 실종된 주민 수색작업을 하다 순직한 지 1년이 돼간다. 그는 지난해 7월 19일 구명조끼 같은기본적인 보호장비도 없이 급류로 내몰려 실종자를 찾다 목숨을 잃었다. 채 상병의 억울한 죽음은 국민적 공분을 야기했고, 무모한 명령이 내려지고 실행된 경위를 밝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변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있다. 진상 규명은 야당의 특겁법과 대통령의 거부권이 충돌하는 정쟁에 휘말려 표류하고 있다. 성역없는 조사로 진실을 밝히고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던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이제 수사를 축소·왜곡하려 했다는 외압 혐의까지 쓰고있는 마당이다.
사고 발생 후 조사에 착수한 해병대 수사단이 간부 장교 8명을 수사 대상으로 적시한 조사자료를 경찰에 이첩할 때까지만 해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순탄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해병대 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의 결재까지 받아 경찰로 넘겨진 조사결과가 회수되고, 수사단장이 보직 해임돼 항명죄로 군사재판에 넘겨지고, 대통령실·국방부·해병대사령부 간 석연찮은 통화 등이 불거지며 수사 동력은 떨어지고 의지는 신뢰를 잃어갔다.
야당에겐 절대적인 호재가 됐다. 누구도 군복무를 피해갈 수 없는 징병제 국가에서 병사의 무고한 죽음은 전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폭발적 사안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이 부당하게 수사에 개입한 의혹이 짙다며 특검을 밀어붙였다. 절대다수 의석에 압도적 찬성 여론까지 등에 업었으니 거칠 게 없었다. 특검법은 지난 5월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야당 주도로 처리됐다.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로 국회로 되돌아온 법안은 재표결에서 출석의원 3분의 2 찬성을 받지못해 폐기됐다.
총선서 압승한 민주당은 22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채상병 특검법을 채추진 해 엊그제 상정 처리했다. 법안 저지를 위한 여당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는 무력하게 끝났다. 동료가 발언하는 동안 대놓고 취침모드에 들어간 의원들의 한가한 모습만 언론을 장식했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특검 부당성을 주장하며 채상병 순직을 `군 장비 파손' 사례에 빗댔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대통령은 지난 5월처럼 거부권을 행사할 것 같다. 국회로 반려된 법안은 국민의힘 반대로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될 공산이 높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특검 회피에는 성공하겠지만 특검을 해야한다는 한결같은 민심을 거슬른 대가는 녹록잖게 치러야 할 것 같다. 우선 특검 방어에 사활을 걸다시피 집착하는 여권에 대한 국민들의 의혹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야당은 두고두고 울궈먹을 사골을 선사받는 셈이다.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의혹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대통령 격노설을 전면 부인했다. 대통령실도 대통령과 국방부 사이에 오간 통화들은 “안보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정상적 소통이었다”며 외압 의혹을 일축했다. 그런데도 여당에선 `특검 수용은 대통령을 죽이는 것'이라는 절박한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야당 대신 대법원장이 특별검사를 추천하는 방식의 특검 수용을 제안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은 배신자로 몰려 몰매를 맞고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국민이 늘어나며 의혹은 의심으로,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가는 모양새다.
문제의 본질이 진실 규명에서 대통령의 수사 개입 여부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보니 공수처 수사를 지켜본 후 결과가 미진하면 특검을 논하자는 대통령의 방어 논리는 설득력을 잃어간다. 대통령이 임명한 공수처장이 대통령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100만명을 훌쩍 넘겨 앞으로 200만에 육박하리라는 예측까지 나온다. 수사외압 의혹에 대한 대통령의 소극적 대응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비상한 상황이지만 국민의힘은 한 전 비대위원장이 김건희 여사가 보낸 문자에 답을 안한 총선 즈음의 사연을 들춰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언제까지 재판받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만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충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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