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 변한 줄 알았는데 저도 참 많이 변했더라고요.
몸의 변화는 물론 사유와 행동거지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는데 설거지하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유교세가 강한 안동에서 나고 자라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남자가 부엌에 들락거리거나 부엌일을 하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아서 부엌일을 터부시했었는데 조석으로 설거지를 하고 사니 속된 말로 놀랄 노자입니다.
밥하고 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건 여자의 당연한 소임이라 여겼던 터라 장가 든 아들이 설거지하고 청소하며 사는 걸 못마땅해 하고 속상해했던 아비가 그렇게 변했으니 놀랄만합니다.
70이 넘은 나이에 설거지하는 남자가 된 건 시류에 영합한 게 아니라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발로에서 나온 그야말로 때늦은 자성의 몸짓입니다. 마음고생 몸 고생을 많이 시킨 못난 남편의 고해성사이기도 합니다. 아내는 23살 꽃 다운 나이에 집도 절도 없는 말단공무원인 제게 그것도 7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날마다 밥해주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옷 다려주고 청소하고 두 아들과 시동생 시누이 건사하며 살았습니다. 그것도 공직수행을 하면서 그리했으니 과히 원 더 우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 아내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고, 그런 아내가 있어 이런저런 자리에서 똥 폼을 잡기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설거지와 빨래라도 내 손으로 해서 아내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자고. 운수 사나워 치매 걸리거나 요양원에 있게 되면 해주고 싶어도 못할 터이니 늦었지만 그리하기를 잘했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날마다 즐겁고 씩씩하게 설거지를 합니다.
설거지. 막상 해보니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시작하는 게 어설퍼서 그렇지 싱크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고 행주를 손에 들고 설거지거리를 씻고 닦고 선반에 얹으면 되는 작업이었습니다. 고기가 눌러 붙은 프라이팬이나 기름기 많은 라면 끓인 냄비는 아직은 설거지하기가 껄끄럽고 부담스럽지만 자꾸 하다보면 잘 할 수 있을 터입니다.
자식들이 출가해 부부 단둘이 사는데다가 아침은 간편식하고 점심은 각자 일터와 놀 터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전기밥솥에 있는 밥과 냉장고에 넣어둔 반찬을 꺼내서 먹으니 설거지할 거리가 적어 식 후 10분만 꼼짝거리면 오케이입니다.
각설하고 살아보니 설거지(뒷설거지)는 필수불가결한 덕목이었습니다. 성공과 실패와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주요변수였고 마지막 승부처였습니다. 마무리의 또 다른 이름이 설거지이기 때문입니다. 일의 잘됨과 못됨도, 제품의 좋고 나쁨도 설거지여하에 달려있었습니다.
집안일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골프도 그러했습니다. 시작은 창대하게 해놓고 마무리를 잘못해서 일을 그르치거나 망치는 경우를 숱하게 경험하기도 하고 보기도 하니 말입니다. 눈에 띄지 않고 하찮아 보이지만 설거지는 대미를 장식하는 마침표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려놓은 음식 먹기는 잘하고 설거지는 미루거나 대충하면 좋은 가정이라 할 수 없음입니다.
문득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야한다'는 고사성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뇌리를 스칩니다. 日新又日新은 원래 고대 중국의 탕(湯)임금이 사용하던 목욕통에 새겨져 있던 경구인데 `잘 씻을 것 즉 스스로의 설거지에 게으르지 말 것'을 다짐하고 채근하는 금언이었습니다.
또 `모든 설거지는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지금(now) 여기(here)라고, 설거지가 곧 실천이라고. 그런고로 설거지는 현재진행형 사랑입니다. 일신우일신이 설거지의 미학입니다.
설거지를 하고 사니 철딱서니가 드디어 철들었나 봅니다. 아마도 내 생의 설거지 때가 도래하고 있어서인가 봅니다. 다행입니다. 설거지를 할 수 있어서.
/시인·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