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분자
회색분자
  •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한솔초 교장
  • 승인 2024.05.02 1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한솔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한솔초 교장

 

“세상은 흑백이 아니고 회색이야.”드라마에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영웅 주인공에게 불법을 저지르는 악당역의 배우가 종종 내뱉는 대사이다. 드라마에서처럼 세상을 회색으로 보는 사람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다. 회색으로 표현되는 사람은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흔히 드러나는 선명하고 확고한 신념, 선악에 대한 명확한 판단, 자신감 넘치는 단호한 행동 등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하기에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조심스러우며, 나약한 인상마저 준다. 따라서 회색 이미지는 세상에서 떠올리는 리더의 모습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회색은 밝은 흰색도 어두운 검은색도 아니기에 사상 논쟁 등이 격렬한 곳에서는 중도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회색에 비유한다. 이때 이러한 사람을 회색분자라 부른다. 학창시절에는 흑과 백, 선과 악이 뚜렷했다. 그래서 행여 회색분자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큰 모욕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50이 훌쩍 넘은 나이, 지금은 어떠냐고?



# 회색의 색채심리

색채심리학(psychology of c olor)에서 회색은 외로움, 쓸쓸함, 고난 등의 상태를 나타낸다. 어린 학생들이 이 색을 많이 사용한다면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도 있다. 성인의 경우 회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안전하고 균형 잡힌 삶을 선호하며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순응적이고 중립적이며 공정하고 타협과 화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보수와 진보를 선과 악의 개념으로 보는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거대한 두 진영은 심리학의 이론마저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이 상호작용하며 끌리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보완성 이론(complementarity theory)'이라 한다. 연애할 때 자신의 성향과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리고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이론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서로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친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권력의 속성은 어떠한가. 누군가는 권력에 대해 `코트(court, 궁정)'란 단어를 쓰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100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법이 같다. 권력자를 향한 절대 충성으로 살아남는 것, 오래 버티는 것 외엔 없다.”라고 했다. 여기에 자의식을 갖는 것은 사치이라 한다. 권력자가 추진하는 정책에 실오라기 만한 반대의견을 내는 순간 권력에서 밀려나는 구도 속에서 자의식을 가진 회색분자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 회색분자로 늙어가기

인기가 없을 것 같은 이미지에도 세상을 회색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을 자기만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위험스럽게 여기기에 본인의 이념이나 직관보다는 객관적인 자료와 실증적인 근거에 의존하는 사람들. 자신의 의지를 굳이 타인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는 까닭에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세상사가 흑과 백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고, 다수가 행복한 사회의 모습을 공유하지만, 이상적인 사회의 요건들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은 서로 상충적이다. 특정한 계층, 지역, 세대를 배려하려는 노력은 다른 계층, 지역, 세대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행복, 어떤 종류의 행복이 더 중요한지에 뚜렷한 답은 없다. 회색의 세계다. 누군가는 흑과 백의 중간 어디인가에 위치할 가장 적절한 회색의 균형점을 찾고, 이 빛깔을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를 진중하게 해나가야 한다.

이제 누가 회색분자라 비판을 하든 비난을 하든 크게 놀라거나 기죽을 나이는 아닌 것 같다. 품위 있는 회색분자가 되어가는 것, 그렇게 더 늙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