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하나 다른 희망과 절망이 인생살이를 쥐락펴락합니다. 긍정과 부정, 행복과 불행, 발전과 추락, 삶과 죽음의 단초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천당이고 절망이 지옥이라 할 만큼 간극이 큽니다.
조물주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만 특별히 준 은사인데 어떤 이는 희망을 일구어 잘 살다가고 어떤 이는 절망에 빠져 비참하게 살다갑니다. 살아보니 희망은 하늘에 뜬 무지개 같았고 절망은 하늘에 낀 먹구름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도 칠흑같이 어두운 먹구름도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데 누구는 무지개를 마음에 담고 좋아라하고 누구는 먹구름에 휘말려 나락에 빠집니다.
가능성의 유무와 의지의 강약이 희망과 절망으로 갈라놓았습니다.
희망은 삶을 건강하게 하는 묘약이었고 절망은 삶을 피폐케 하는 독약이었습니다.
중국 작가 루쉰의 단편소설 `고향' 끝부분에 있는 희망을 되새김질 해봅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 할 것도 없고, 없다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도 같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곧 길이 생겨난다. 그렇다. 희망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때 비로소 생겨난다. 사람들이 희망을 갖지 않는 순간, 희망은 사라진다.' 라고.
그렇습니다. 희망은 희망하는 이의 선물이자 자기실현적 예언입니다. 희망대로 살면 현실이 되고, 같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 되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합니다.
희망은 이기적이기도 합니다.
1980년 말에 노영심이 작사 작곡해 변진섭과 함께 불러 크게 히트했던 `희망 사항'노랫말이 이를 웅변합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중략) /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 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희망사항이 달라서 세상사와 인생사가 다양하고 재미있지만 갈등과 반목과 불화를 초래하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니 얄궂습니다.
아전인수의 정치권이 대표적이지만 탐욕에 젖은 우리네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아 미편할 때가 많습니다. 또 절망적인 결과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가 낭패를 보는 희망고문도 왕왕 봅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은 여전히 감동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전심전력을 다해 노력하면 헤쳐 나갈 방도가 생긴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평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믿음을 견지하기 때문입니다.
맨발걷기와 접지가 일상이 된 후 더욱 그리 삽니다. 굴지의 병원도 내로라는 의사도 두 손 든 말기 암 환자들이 맨발걷기와 접지를 통해 치유되는 걸 직접 목도하고 실감하고 있어서입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살 수 있는 자구책을 만들고, 자구책이 간절하고 절실하게 실행에 옮겨져서 몇 달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청천벽력을 보란 듯이 날려버린 이들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걸 믿어 감사히 여깁니다. 이렇듯 실패와 좌절 속에 영그는 희망이 참된 희망이고 희망의 본령입니다.
절망은 실패와 좌절에 굴복하고 자포자기 하는 이에게 엄습합니다. 생목숨까지 끊게 하는 고약한 놈이니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자신을 독려한 나폴레옹처럼 `내 사전에 절망이란 없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야 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나라와 자식 걱정으로 잠을 설칩니다. 미래가 암울해서 입니다.
이제 희망이라곤 치매 안 걸리고 요양원에 안 가고 살다 가는 것과 나라와 자식들이 잘 되는 것 뿐 이니 늙기는 늙었나 봅니다.
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 올립니다. 꼭 그리해달라고, 절망할 겨를 없이 살게 해주셔 감사하다고.
그대도 날마다 푸른 희망을 먹고 희망차게 살기를. 절망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시인·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