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의 삶
공자님의 삶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4.03.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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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공자님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사셨을까? 자신이 만든 정형화된 예법에 따라, 반드시 이래야 하고 저래선 절대 안 된다는 자신만의 우물 속에 갇혀 사셨을까? 공자님께서는 과거의 경험 및 이런저런 지식을 습득하면서 형성된 온갖 주견에 사로잡혀 있는 업식의 `나'를 극복함으로써 `나 없음`의 무아(無我) 상태인 예(禮)로 돌아가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역설하셨다.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간 군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我相) 및 아집(我執)이 없는 각자(覺者) 즉, 도(道)를 깨달은 이와 다르지 않기에, 그 어떤 정형화된 틀도 고집하거나 도그마에 집착하는 일이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공자님은 군자불기(君子不器), 즉 군자는 정형화된 그릇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매 순간 자신을 부인하고 온갖 주견을 텅 비워냄으로써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 성령의 도구로 쓰이는 삶,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를 깨닫고,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애자재한 삶이 바로 군자불기의 삶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공자님의 삶을 맹자님은 “可以仕則仕(가이사즉사) 可以止則止(가이지즉지) 可以久則久(가이구즉구) 可以速則速(가이속즉속) 所謂無可無不可也(소위무가무불가야)”란 문장으로 압축-요약했다. “벼슬길에 나갈만하면 벼슬길에 나가고 그만둘만하면 곧 그만두며, 오래 머물만하면 오래 머물고, 속히 떠날 만하면 속히 떠난다. 특별히 해야 하는 일도 없고, 해서 안 되는 일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로, 개똥을 약으로 쓰고, 황금도 버릴 줄 아는 것이 군자불기의 삶이다.

노자께서 말씀하신, '함도 없고 하지 않음도 없다`는 의미의 '無爲(무위) 無不爲(무불위)` 및 금강경의 가르침인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법향이 공자님의 삶에서 진하게 풍기는 것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팔이 안으로 굽는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를 통해 군자가 되는 것, 자신의 만족과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나가 사라짐으로써 무아를 깨닫고 참다운 보살이 되는 것, 제 안의 온갖 주견을 비워내고 이웃을 제 몸처럼 돌보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는 것 등이 표현만 다룰 뿐, 그 본질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자신의 만족과 이득을 위해 하느님과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을 맹신하며, 성경과 불경과 유학의 가르침을 오남용하는 짓은 이제 지구촌에서 사라져야 한다.

부처님과 불교가 이 땅에 알려지기 전이라고 해서, 예수님과 기독교가 이 땅에 알려지기 전이라고 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섭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어리석은 종교인들은 척결돼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에도 이 땅 한반도 전역에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에는 오곡 백화가 무르익는 하느님의 섭리가 어찌 없었겠는가? 이 땅 삼천 리 강산에 한순간도 멈춘 적 없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독교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한들 어떻고, 불교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한들 어떻고, 유교나 도교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한들 어떻겠는가? 무늬만 기독교고 무늬만 불교가 아니라, 참으로 중생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보살, 이웃을 제 몸처럼 보살피며 원수조차 사랑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로 넘치는 아름다운 지구촌이 되길, 다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군자(君子)들로 넘치는 상생(相生)의 지구촌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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