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는 참 많은 격동의 시기를 지내왔다. 정부수립과 함께 찾아온 좌·우익의 이념대립이 남북분단과 동시에 6·25를 불러오더니 군사정부의 출범으로 산업화라는 고도성장과 함께 한 자유, 민주, 평등, 인권의 비민주화의 그늘.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참여(Participation)의 시대를 열었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은 참여민주주의의 두 수레바퀴였고 견인차 역할을 한 덕분에 지금은 참여 폭발로 인한 참여의 위기(Crisis of Participation)라는 역설을 맞고 있다. 다른 국가, 민족이 수백 년에 걸친 역사를 불과 수십 년이라는 단기간에 경험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경제성장 이외에 자유, 평등, 인권, 복지와 같은 인간적 가치가 존중받고 우선시되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강국, 민주국가의 이면에 또 다른 그늘이 드리울 줄 누가 알았을까?
수년 전부터 학생인권과 수업권이 강조되며 학생인권 조례를 탄생시키더니 부메랑처럼 선생님들의 인권과 교권이 추락하다 못해 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됐다. 학생인권조례의 시대는 참여폭발이라는 시류와 맞물리며 급기야는 선생님들을 사지로 내몰았고 한계상황에 고통받은 선생님들은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불러왔다. 결국 지난 21일 국회에서는 교권회복 4법(교원지위법, 초·중등교육법, 유아교육법, 교육기본법) 등 4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 데 어르신 한 분이 “선상님은 어디 계시냐”라고 물으셨다. 우리는 “선상님? 선생님이요?”하면서 모두 웃었다. 그러자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높이 계시는 윗사람이신겨, 그래서 선상님이신겨.”
국어사전에 보면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先生)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노인분 표현인 (先上님)은 국어사전에는 충청·강원지역 선생님의 사투리로 정의되어 있지만 내포된 의미는 분명 선생님 그 이상의 존경과 권위와 인격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쌤이…쌤?' 요즘 흔하게 들리고 쉽게 하는 말이다. 중학생인 막내 아들에게 “왜 선생님을 쌤이라 해?”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이 “쎄임(Same) 선생님이랑 우리는 동일해. 그래서 우리는 쌤이야.” 선상님까지는 아니어도 어찌 선생님이 쌤이 되어 버렸을까?
우리의 선상님들을 누가 쌤으로 만들어 버린 걸까. 반복되는 선생님들의 비보에 참으로 착잡 하다못해 같은 선생으로서 비통하기까지 했는데 뉴스를 보니 선생님들에 대한 악성 민원을 교육감이 직접 고발 조치를 한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교육감이 이런 고육지책을 내놓을까. 선생님을 선상님으로 못 모셔도 선생님의 존엄과 인격을 보호하고자 하는 교육감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거리로 나서고 있는 선생님들을 보고 악성민원에 대한 고발까지 들고 나온 교육 당국을 보면서 존경과 권위의 상징인 `선상님'이 산업사회의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선생님'으로 표준화되더니 민주화와 IT 기술혁명의 시대적 산물로 `쌤'이 되어 버린 현실.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 비애를 느낀다.
한 집단이나 조직, 크게는 국가 공동체가 지향하는 시대적·공동체적 가치를 이념, 거창하게 말하면 이데올로기라 한다. 쌤의 이데올로기가 학생인권조례를 탄생시켰다면 이제는 선상님의 이데올로기를 다시금 생각해볼 시기가 아닐까.
학생들의 인권도 중요하고 학습권도 중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 이상의 존엄과 인격의 상징인 선상님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아무리 꼰대라 해도 나는 선상님 `OK' 쌤 `NO'다. 선생님은 무조건 선상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