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이강년)
이강년 선생은 1858년 12월30일 경북 문경 가은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 문경에 은거하던 중 동학군에 투신했다. 1895년 제천에서 유인석 을미의병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생포해 농암시장에서 죄상을 낱낱이 들추며 처단했다. 그후 의병을 거느리고 제천에 유인석 선생을 찾아 의진에 합류했다.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1896년 3월17일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해 전과를 거두고 문경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4월 제천 의병부대가 장기렴의 관군에게 대패하고 의병장 유인석 선생도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후군장을 맡아 유인석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단양으로 후퇴했다. 1년 후 요동으로 들어간 선생은 유인석을 만나 만주지역의 한인 자치단체를 결성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선생은 학문을 연구했는데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훗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한편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1907년 군대마저 해산했다. 1907년 3월 유인석과 강원도 원주, 횡성 등지에서 다시 거병했다. 6월에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탈취해 무기를 확충하고 7월에는 제천으로 진군해 민긍호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500여명의 적을 토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같은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이강년 선생을 도체찰사에 제수하며 밀조까지 내렸다. 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에서 선생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제천에서 진을 치고 충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놓쳐 충주 진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운강의 의병부대는 9월16일 제천에서 적 200명, 9월27일 죽령에서 적 200명, 10월5일 단양에서 적 80명, 10월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선생은 과로로 병을 얻어 11월12일 풍기 복상동에서는 대패했다.
한편 이런 식의 의병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이인영과 허위 등의 의병장은 전국의 의진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했는데 선생은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됐다.`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서둘렀으나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조달이 어려워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선생은 서울진공을 미루고 부대를 재정비해 이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여케 한 선생의 살신성인의 모습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6월4일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잡혔다. 1908년 9월22일 경성공소원이 내란죄를 적용했다. 결국 이강년 의병장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13일 51세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해 엮어진 `운강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지난해 가을 제천에서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의병 역사의 기록 창의록'이 공연됐다. 의병의 후예 제천 학생들이`조국을 품고 참으로 멋지게 살다간 사나이' 운강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교직 생활의 마지막 여름방학 때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운강이강년기념관'을 가서 선생을 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