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인정과 자연을 노래한 옥소 권섭
조선의 인정과 자연을 노래한 옥소 권섭
  • 김명철 제천교육장
  • 승인 2023.03.2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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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제천교육장

 

청풍명월 제천의 자연과 조선의 인정을 노래한 옥소 권섭 선생은 18세기 노론 명문가 사대부 출신으로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백부가 유명한 수암 권상하 선생이다. 권섭은 14살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백부인 권상하에게 의탁하여 학문과 함께 서울 사대부 자제들과 어울렸다. 특히 백부인 권상하는 당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권섭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당대의 유명한 문사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자연을 유람하면서 폭넓은 사상 체계와 문학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권섭은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으나 관직 운은 없었다. 십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급제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32세 때 송시열과 인현왕후 폐위 상소에 가담한 것을 빌미로 유배를 당하면서 정계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권섭은 낙향하여 30여년을 제천과 청풍을 오가며 수많은 산수유람 문학을 남겨 한국문학사의 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 제천시내에서 충주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면 선생이 살았다는 제천시 봉양읍 신동리가 나온다. 국도변에 큼지막하게 <신동>이라는 마을 표지판이 있고 그 옆에 전국 대학교 교수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권섭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쪽으로 마을 길을 따라 100미터 남짓 거리에 권섭의 삶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문암영당'이 자리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살 때부터 시를 썼다는 천재적인 문학가 옥소 권섭 선생과 제천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옥소가 5세 무렵, 당시 성리학의 대학자였던 백부 수암 권상하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35세의 나이로 청풍 황강으로 이주하게 된다. 옥소는 이때부터 청풍을 오가며 10세까지 5년간, 이후 14세 때 부친이 별세하자 25세까지 11년간, 청풍에서 백부이신 수암의 보살핌에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러니 청풍은 옥소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우리 문단에서 단순한 시조시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왜냐하면 옥소의 90 생애는 문학과 예술의 세계로 꽉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남겨놓은 자필 문집 50여 권속에는 2천수가 넘는 한시와 75수의 국문시조, 2편의 국문가사가 있다. 또한 그림도 채색화와 인문화가 수십 점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시조 한역가와 한역소설 `번설경전'등의 작품을 남겼으니 작품의 수로 볼 때 대가의 위치에 속할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작품 하나하나가 소재·주제, 시어·기법의 독자성을 보유하고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위치한 유인석 선생의 의암거택에는 `옥소고(玉所稿)'가 소장되어 있다. `옥소고'는 18세기 유명한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의 개인 문집이다. 권섭은 일생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천 청풍으로 낙향하여 은거생활과 여행을 즐겼다. 그러면서 한시(漢詩), 유람기, 국문시가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현재 전하는 것만으로도 46권에 달하는 `옥소고'는 이와 같은 18세기 대문호인 권섭의 문학 세계를 상세히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옥소 권섭 선생의 문학적 위상을 높이고 제천 시민의 예술적 감성에 기여하기 위해 2004년부터 옥소예술제가 거행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북도연합회 제천지회 주관으로 해마다 열리는 옥소예술제는 고유제를 비롯하여 백일장, 작가 사진전, 권섭 유품전, 미술전, 편지 전시회, 국악 등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된다.

전쟁과 지진으로 전 지구촌이 우울한 요즘 답답하고 삭막한 마음을 푸른 산, 맑은 물, 건강한 땅 제천 청풍호에서 옥소 권섭 선생의 문학사적 발자취를 따라 삶과 향기로운 예술의 혼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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