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 혼사가 있어 서울에 갔다. 혼사가 일찍 끝났는데 내려오는 차가 마땅치 않아 5~6시간이 남는다. 어쨌든 역 근방에서 놀아야 하니 용산역으로 간다.
노량진역에서 환승하는데 갑자기 노량진 수산시장 이정표에 눈이 간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한 바퀴 돌다 건어물을 한 보따리 샀다.
멸치, 마른 꼴뚜기, 황태, 김 등을 샀더니 가격도 꽤 된다. 수산시장은 물건을 검은 비닐봉투에 담아준다. 큼지막한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간단한 회에 소주 한 잔 한다.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취하면 홀로 놀기가 안 되고 빨리 귀가해야 한다. 소주 한 병 시켜서 반 병을 한 시간 동안 마신다. 살짝 술기운이 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다.
용산역에 오니 시간이 세 시간 이상 남았다. 용산역 주변은 재개발이 완료된 동네와 아직 개발이 안 된 동네로 나뉜다.
개발된 동네는 화려하고 깔끔하다. 어슬렁거려보지만 시간 때울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재개발되지 않은 동네로 발걸음을 돌린다. 몇 년 전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시간을 때운 기억이 있는 동네다. 역시 정감이 간다. 나 같은 노털이 갈 만한 곳도 보인다.
시간이 많아 한 바퀴 돌아보니 몇 년 안 온 사이 이 허름한 동네가 상당히 많이 변했다.
개발이 안 되었으니 임대료가 싸다. 싼 임대료 덕에 젊은 사람들이 갈 만한 틈새 가게들이 들어섰다. 우범지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으슥한 골목에 간판도 크지 않은 고급스러운 카페가 자리를 잡고, 가격이 꽤 나가는 와인을 병째로 파는 와인바도 들어앉아 있고, 2~30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쌀국수집도 있다. 2차, 3차 손님을 노리는 포장마차, 넓은 맥줏집도 자리하고 있다.
이런 집들은 거의 젊은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다. 나 같은 노인들은 눈에 안 띈다. 아줌마 아저씨도 없는 마당에 할배가 가당키나 하겠어? 나는 이런 눈치가 없는 편이다. 좋은 가게들이 많이 늘어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일단 맥주 한 잔으로 시작하려고 2차 고객을 타겟으로 하는 맥줏집에 호기 있게 들어갔다. 내가 첫 손님인가보다.
생맥주 한 잔 시켰더니, “맥주만요?”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양이 많지 않고 값이 싼 번데기를 시켰더니 개시 손님이라 사이드 안주 주문은 안 되고 값이 되고 양 많은 메인 안주를 시켜야 된단다. 개시 손님인데 그냥 나가면 재수 없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냥 나오는데 주인이 무척 좋아하는 눈치다.
허름한 골목을 지나는데 간판 없는 집이 눈에 띄는데 젊은 커플이 가게 밖 뜰에서 기다리고 있다.
뭐하는 덴가 궁금해서 들어가 커플에게 여기가 뭐하는 데에요? 레스토랑이에요. 뭐를 팔아요? 라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점원이 나와서 왜 그러냐고 약간은 압박조로 물어본다. 아니 그냥…. 얼버무리다가 분위기가 좋지 않아 그냥 쫓기듯 나왔다. 그럼 와인 한잔 먹자. 와인 가게에 갔더니 어떻게 오셨냐구? 와인 한 잔 하려고. 여기는 와인을 병으로 팔아요. 쩝, 돌아 나온다.
그때까지 왜 그런지 눈치 채지 못했다. 꼰대 취향의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사람 구경하다가 `왜 그러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건어물 담은 까만 비닐 봉투! 재킷을 입기는 했지만 와이셔츠가 아니라 티셔츠에 바람이 불어 헝클어진 머리, 거의 닦지 않아 후줄근한 구두 + 검은 비닐 봉투 = 노숙자.
더구나 용산역 부근. 그랬더니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가득 찬 보쌈집에 가서 막걸리 한잔하니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푸근하다. 그날 난 혼자 막걸리를 두 통이나 마시고 얼근히 취해 집에 왔다. 다음에는 파고다 공원 근방으로 가야 되나?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