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는 중요하다. 서양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엇일까? 현재 있음(is)이다.`현재 있다(is)'란 무언가? 지금(now) 여기(here)이다. 삶의 현주소라고나 할까. 이게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존재(being), 현존(existence), 현전(presence)으로 서양 존재론의 핵심이다. 서양의 철학에서는 현재(여기)가 가장 중요하다. 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서 신은 영원한 현재, 또는 현존 자체(existence itself)이다.
수양을 할 때에도 현재에 머물라고 한다. 왜 그럴까? 답을 먼저 말하자면 현재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피안으로 가는 입구이자 출구라고나 할까?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없기 때문에 어디론가 뛰기 위한 디딤돌이 되지 않는다. 없는 걸 딛고 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로 출구가 될 수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신기루와 같아서 그걸 딛고 뛰려고 하면 헛몸짓만 하게 된다. 과거의 영광이나 미래의 희망찬 꿈에서 출발하면 출구 없는 미로에서 허송세월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현재이다. 곧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건 현재이다. 그래서 현재에 머무르라고 한다.
현재에 머무르면 될 거 아니냐구?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의 생각은 이미 과거와 미래에 의해 상당 부분 점령당해 있기 때문이다. 앞에 고급 차가 달리고 있다. 움찔해서 천천히 가거나 앞질러 간다. 왜 움찔할까? 한 번 박아서 엄청나게 비싼 수리비를 물어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현재가 잠식당한 것이다. 멋진 이성이 지나가면 애써 고개를 돌린다. 왜? 이성에 의해서 고난을 겪은 과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 저절로 멋진 이성을 따라가면 그건 현재적이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다. 내가 인간 종으로 태어나서 갖게 된 습성 때문에 시선이 따라간 것이다. 다람쥐는 아무리 멋진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간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과거의) 사실 때문에 시선이 이성을 따라간 것이다. 곧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에 시선이 간 것이고 이는 이미 인간 종으로의 탄생이라는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근심, 걱정, 불안 등도 현재적인 건 아니다. 그런 정서나 느낌은 아직 오지 않은 사태에 대한 것이다. 곧 미래에 대해 당겨서 생각하는 것이다. 근심, 걱정할 필요도 없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근심,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미래에 대비해 현재를 투자한다. 곧 아직 오지 않은 걸 위해 현재 있는 걸 던지며 산다. 역설적이다. 살고 있다(is)고 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곧 과거-현재-미래의 연쇄 속에서 살아간다. 과거란 이미 지나가버려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다. 현재는? 현재는 찰나이며 찰나란 폭이 없다. 곧 순간이어서 연속이 되지 않는다. 결국 과거-현재-미래의 연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없었다가 순간적으로만 있고 바로 없어진다. 생기는 듯하다가 사라지는 것 이게 우리네 삶이다. 생기고 없어지는 게 우리 삶의 특징이다. 우리는 지금도 태어남과 죽음(生滅)의 연쇄 가운데서 살아간다. 뭔가가 일어났다고? 그럼 생멸 과정 속에 들어간 것이다. 생기는 건 과거의 일이고 없어지는 건 미래의 일이다. 현재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不生不滅). 생기고 없어지는 건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건 시간의 연쇄 밖에 있게 된다. 현재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며 이는 생기고 없어지는 이 세상을 벗어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는 피안의 입구가 된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