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성의 파괴력
단순성의 파괴력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6.2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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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요새는 단순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산다. 단순함은 실천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그 파괴력이 만만치 않다. 서양의 철학사에는 인간 사유체계를 총체적으로 뒤집어 놓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오캄이다. 그가 1500년간 인간 머리로 구축해놓은 사상체계를 무너트릴 때 사용한 무기는 단순성(simplicity)이다. 그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걸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 곧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걸 두세 가지나 그 이상의 원리를 동원해서 설명하는 건 비경제적이라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데(사유경제의 원리) 경제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최소한으로 생각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다른 말로는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것들의 개수를 늘리지 말라는 원리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단순한 원리가 어떻게 서양의 사상 체계를 붕괴시킬까? 요건 좀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나를 생각해보자. 나는 까만 머리에 흰 눈썹 동양인의 피부색에 중간 키의 몸과 적당한 몸무게를 가진 인물이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눈앞에 보고 듣는 것들과 머릿속에 든 생각들이다. 그런데 그걸 하나씩 제거해보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제거해보자. 머리에서 색을 제거하고 피부색도 제거하고 내 몸의 형체도 제거해보자. 투명 인간을 생각해보면 된다. 투명인간이라는 아이디어는 이런 제거 사유실험에서 출현한다.

다 제거하면 남는 것이 있을까? 보이고 들리는 감각적인 특성들을 다 제거해도 그 배후에 뭔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감각적 성질들을 담지하고 있는 비감각적인 무엇을 서양에서는 실체라고 한다. 나에게서 감각적 성질들을 다 제거하고 남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나'다. 나 밖의 대상들이나 내가 끊임없이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채로 고유성(identity)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실체이다.

나를 예로 들면`나'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나라는 존재는 감각적 경험이나 생각 이외에 별도로 상정된 것이다. 그럼 나를 별도로 상정하지 않고 내가 겪는 경험이나 생각만이 있다고 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설명이 안 될까?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나'는 경험되지 않는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각들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만이 있다.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아도 나의 경험과 생각은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구태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불필요하게 늘릴 필요가 없다. 곧 없어도 되는 존재를 상정하는 건 불필요하게 존재의 수를 늘리는 것이고 이는 사유 경제의 원리에 어긋난다.

사유경제의 원리에 맞춰 생각해보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늘린 것들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신? 경험되지 않는다. 신의 머릿속에서 생각된 신적인 이념들? 우리 머리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 그것도 경험되거나 생각되는 건 아니다. 나 밖의 실체? 그것도 경험되는 건 아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그것도 불필요하게 상정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그것도 없어도 되는 걸 늘린 것이다.

신도 불필요하고 신적인 이념도 불필요하고, 나도 불필요하고 나 밖의 것들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실체도 불필요한 것이 되면 서양의 사상체계는 어떻게 될까? 남는 게 별로 없다. 적어도 인간 머리로 만들어내서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다 없어지게 된다. 인간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것은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일 뿐이다. 이렇게 단순성의 원리는 서양의 사상체계를 붕괴시킨다.

모든 것이 붕괴된 폐허 위에 데카르트와 베이컨은 새로운 건축물을 구축하는데 그게 과학이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그럼 모든 걸 버려야 하고 그러려면 단순하게 생각하라.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걸 골라보라. 거의 없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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