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의 별세로 삼성가(家) 상속에 대한 수많은 언론보도가 있었다. 재산규모는 얼마고 상속세가 얼마고, 향후 승계구도는 어떻고 등등 천문학적인 재산규모에 걸맞게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굳이 삼성가와 같은 부호가 아니더라도 상속은 많은 사람이 겪는 문제이다. 재산의 획득과 분배라는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상속문화는 그 시대의 특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선조들의 상속문화는 어떠했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열쇠가 있으니, 바로 분재기이다. 분재기는 재산 분배를 기록한 문서, 즉 일종의 재산상속문서를 말한다. 우리 지역에도 이 분재기가 다수 남아있으며, 대표적인 사례가 옥천 향토전시관에서 소장 중인 하동정씨 분재기이다.
분재기의 구성은 재산을 상속하는 배경과 그 원칙을 쓴 서문, 자녀별로 나누어 준 토지와 노비 등의 내용과 그 수를 기재한 본문, 재주와 증인 등의 서명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서 말한 하동정씨 분재기는 1628년 5월 13일 남편 정홍량이 죽은 후 그의 처 한씨가 남편이 소유한 재산을 나누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서두에는 재산을 상속하는 배경 등을 쓰고, 이어서 3남 5녀의 자녀들과 죽은 남편 첩의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을 적었다. 이를 증명하는 증인으로는 정홍량의 4촌 동생과 6촌 동생이 참여하였으며, 글은 정홍량의 삼촌숙(三寸叔)인 정립 선생이 작성하였다. 그리고 재주인 한씨 부인은 도장을 찍고, 증인들과 작성자인 정립이 서명하여 문서의 공신력을 갖추었다. 이 문서를 보고 있으면 조선시대 꼼꼼하고 체계적인 상속방식에 놀라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상속에는 어떠한 원칙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조선후기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강화되면서 점차 장자상속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는 조선후기 약 300여년 정도의 현상이고 그 이전에는 균분상속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칙은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되어 있었는데, 하동정씨 분재기에서도 17세기에 작성된 문서임에도 3남은 물론 결혼한 1~3녀와 4~5녀, 첩의 아들에게까지 재산을 물려주고 있어 당시 재산의 균분상속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재산상속을 미처 하지 못한 경우에는 어떠할까? 이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으니, 바로 보물 477호 이이 남매 화회문기이다. 이 문서는 부모가 죽은 뒤 형제·자매가 모여 합의하여 작성한 문서인데, 여기에서도 균분상속의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지분배에 있어서 단순히 면적이 아닌 수확량까지 고려하였다는 점은 매우 놀랍다.
한편 조선시대 상속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 노비까지도 이루어졌다. 안동 경류정 고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노 복만 분급문기에서는 사내 종인 복만이 두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해남윤씨 녹우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임조이라는 평민 여성의 분재기를 통해서 당시 평민들의 재산상속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분재기를 통해 조선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재산분배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상속 과정에서 빈번한 소송의 발생, 나아가 범죄까지 벌어지는 모습과 비교해본다면, 상속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