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잡았다
감 잡았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10.2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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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필 때가 아닌데 아이리스가 꽃대를 올렸다. 그리고 상강이 지난 어느 날 새벽나절 수줍게 꽃을 피웠다. 봄에 봉우리를 열었을 때와 달리 하루가 지나자 바로 색을 잃고 시든다. 아쉬웠던지 시든 꽃을 두고 옆구리에서 또 하나의 봉우리가 연다. “무슨 향이 나니?”, “청아한 시냇물의 정령?”. “옆에 있는 국화는?”, “꽃가루가 가득한, 숲에서 느낄 법한 바람”. “아빠가 느끼기엔, 국화에선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숙성된 식초의 상큼함, 아이리스는 설탕이 반쯤 들어가 만들어진 달달한 과일청 정도”.

그리고 그리던 큰딸이 집에 왔다. 4년 대학생활에 1년 남짓 조교생활을 하면서 객지 생활을 하는 아이. 큰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뭐든 해줘야 하는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하여 아빠가 구워주는 고기가 제일 맛나다는 아이들의 말에 고기 굽기 준비다. 참숯을 피우고 커다란 방패 크기의 솥뚜껑을 달군다. 숯이 색을 달리하며 솥뚜껑의 색도 다르게 한다. 오랜 기간 사용하며 머금은 기름을 드러낸다. 색이 변하고 키친타올이 지나간 자리는 기름이 두른 듯 반질반질 윤이 난다. 이윽고 고기를 얹지 않았는데 고기 냄새가 난다. 색이 변하고 표면의 질감이 달라지고 이내 고기향이 난다. 이젠 눈에 보이는 두툼한 고기가 오른다. 적당히 달궈진 솥뚜껑 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색을 달리한다. 어두운 갈색이 마블링처럼 낀 노릇노릇한 맛깔스러운 색이다. 밑면은 참숯이, 윗면은 가을 햇살이 고기를 익힌다.

고기 굽는 준비를 하는 동안 뜰로 나온 큰딸과 꽃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고기의 맛깔스런 색을 즐기며, 쌈을 싸서 아빠의 입에 넣어주는 고기를 날름 받아먹는다. 더 없는 맛이다. 등으로 느끼는 가을날의 따스함과 가슴으로 느끼는 행복이 고기의 맛을 완벽하게 해 준다. 그렇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집안 곳곳에 피어 있는 국화향에 국화의 색은 진해져 더 이상 농후해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가을을 벌과 나비, 꽃등에, 심지어 파리까지 요란한 날갯짓을 하며 농후함에 가담한다.

해는 높아지고 높다랗게 매달린 감을 뚫고 땅에 이른다. 국화의 농후한 색에 질세라 균일하게 색을 볼그레하게 물들인다. 감잎의 다채로운 색과는 대조적이지만 덩어리에 맞는 무게감 있는 색이다. 오랜 시간 기다리며 물들인 색이다. 깊은 속에서부터 시나브로 물들어 껍질에 이르렀다. 감 씨앗이 갈색인 것이 주홍색 감의 속살을 통해 보인다. 진해지는 색을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감꼭지를 버리고 떨어진다. 그것도 국화 한가운데로, 날갯짓하며 모여들었던 곤충들은 순식간에 해산이다. 그리고 한순간 다시 모여든다. 국화 속으로 일제히 파고든다. 떨어진 감은 형태를 바꾸었다. 나비며 벌이며 웅웅거리던 것들이 일제히 감에 붙어 단맛을 즐긴다. 그러면서 일제히 소리를 낸다. 나 감 잡았다!

늘 시작은 미약했다. 지난겨울을 이겨낸 국화뿌리에서 몇 개의 싹이 자랐고, 그 싹을 나누어 땅에 꽂았다. 봄과 여름을 지나며 많은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향으로 벌을 불러들이는 동안, 국화는 가지를 늘리고 함초롬 덩치만 키웠다. 다른 꽃들은 장마에 뜨거운 햇살에 벌레도 등이 굽는 추위에 사그라졌다.

상강이 지나고, 새벽의 쌀쌀함을 넘어 아침인데 무척이나 춥다. 추운 아침에 물기를 머금은 초록들이 이슬을 달았다. 발길을 따라 국화는 색을 더 진하게 과시한다. 향도 강해지고, 햇살이 드리우며 벌과 등에가 따라 드리우며 색의 문양을 바꾼다. 문양에 소리가 더해지며 미려한 바람에 향이 리듬을 탄다. 코에 들었다. 입으로 들기도 하며 가슴을 부풀게 한다. 가슴속이 노랗게 물들일 것만 같다. 향이 맑고 그윽하다.

향은 집안 어디에나 그윽하게 배었다. 아직 엄마고양이 곁을 못 떠나는 새끼 길량이들이 국화 그늘아래서 몸치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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