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바람
  •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 승인 2020.09.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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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비엔날레팀장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산업1팀장

 

긴긴 장마에 우물 안 깊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다. 물의 양도 늘었지만, 지표수다 보니 뿌연 물이 우물 바닥을 가렸다. 기계의 힘을 빌려 어지간히 뿜어내고 연신 두레박으로 잔물 처리를 한다. 제법 바닥의 고인돌이 드러나고,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촘촘하게 쌓은 우물 안 돌 틈에 간신히 발끝으로 딛고, 손가락으로 어렵게 돌을 집고 내려간다. 허리를 굽히고 바닥에 괴인 물을 떠내어 두레박에 담는다. 황금빛 잔모래가 섞여 걸쭉하다. 담긴 두레박이 위로 향한다. 위에서 길어 올리는 사람이 일부러 그런지 두레박에 떠 넣은 물이 다시 등줄기에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이 등줄기에 닿을 때마다 `아!'소리가 저절로 나고 입술이 파래진다. 낮의 햇볕이 아직도 따가운데 우물 안은 한기가 돈다. 마지막 한 바가지를 거둔다. 거대한 하얀 바닥돌이 드러난다. 완벽하리만큼 말끔한 마무리다. 이내 부드럽고도 가녀린 바람이 든다. 네 방향의 밑돌 틈에서 나지막이 바닥을 기어들어오는 물과 함께.

다시 돌 틈을 디뎌가며 우물 안을 빠져나온다. 다리는 후들후들 손가락은 저려온다. 우물이 이리 깊었나? 얼마나 더 올라야 하나 고개를 들어 보이는 하늘은, 발을 띠는 것을 잊게 한다. 너른 바람은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을 옮기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는 다시 바닥을 향한다. 하얀 돌을 어루만지듯 물이 고인다. “아! 맑다.” 우물을 다 빠져나왔을 때 온몸을 어루만지는 바람을 맞는다. 부드럽고도 그윽한 바람이다. 매년 우물청소를 하고 나오시던 아버지를 어루만지듯 에워싸던 바람이다. 그리운 아버지다.

우물의 커다란 바닥 돌을 덮고, 사방의 밑돌을 채우고, 원형의 둘레석을 층층이 올라오는 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바닥돌을 감싸고 하늘의 구름도 담았다. 우물 안에서 올라오는 서늘바람을 이어 몽롱한 향을 실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등 뒤의 너른 공간을 채우고, 작은 코로 빨려들 듯 향이 든다. 여린 듯 가녀린 향, 낮의 햇살이 강할수록 향은 매혹적이다. 매혹적인 바람의 기류가 연이어진다. 그 진원은 좁쌀만큼 작지만, 황금빛깔의 금목서다. 그렇게 오후 내내 향은 습하지 않은 선선한 바람과 시공을 함께한다.

오후의 따가운 햇볕이 무색할 정도로 해는 재빨리 저물며, 소슬한 갈바람이 몸에 든다. 창을 넘어 드는 무겁던 바람이 어느덧 시원함을 넘어 서늘하다. 바람이 창턱을 넘는 시간에 맞춰 귀뚜라미가 소리를 낸다. 각각의 소리는 맴돌다 흘러 창턱을 넘는다. 그리고 연이어 감미로운 바람이 든다. 소슬한 갈바람에 웬 감미로움, 코로 들어 가슴에 머리에 배인 향은 발을 움직이게 한다. 바람은 발을 끌어 향의 시작점에 세운다. 바람은 멎고 귀뚜라미 소리도 멎는다. 그리고 호흡도 멎는다. 소슬한 밤바람이 아닌 하얀 폭죽 모양의 꽃은 바람의 리듬을 즐기며, 향을 바람에 뿜어낸다. 밤새 그렇게 야래향은 온 집안을 채운다.

서늘한 냉기에 부드러운 솜이불을 쥐어 잡고 코끝까지 끌어올리던 새벽나절에서, 깨끗한 아침바람을 맞이하며 맑은 아침의 햇살을 안고, 우물을 길어 물뿌리기에 옮겨 담으며 발등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소스라치고, 긴소매를 입을까 반소매를 입을까 꺼내놓고, 살랑살랑 바람을 타는 감나무 잎사귀에 한눈을 파는 시간, 가뿐하게 바람머리를 뒤로 넘겨주는 한낮의 바람을 이어 저녁의 소슬함을 따듯한 차 한 잔으로 채워주는 시간이 바람으로 이어진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가을날의 새벽, 방울방울 이슬과 촘촘하게 박힌 꽃망울로 수놓은 소국, 김장배추 뒷면에 제법 까끌까끌하게 솜털로 나고, 땅을 헤집고 쭉쭉 자라 대를 키우는 쪽파가 소소한 기쁨의 날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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