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 산길을 걷다 보면 `어! 뭐지?'하면서 발길을 멈추게 하는 향기가 있다.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그곳엔 언뜻 화원에서나 볼 수 있는 열대성 홍콩야자 잎을 생각나게 하는 식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걷던 길 멈추게 했던 향기의 주인공, 으름덩굴이다. 혹시 만났거든 암꽃을 찾아 자세히 살펴보자. 가위로 뚝! 자른 듯한 암술 끝 부분이 일반적으로 아는 암술머리와는 사뭇 다르게 생겼다.
꽃은 식물에 있어 생식기관에 해당한다. 동물 중에서도 암컷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수정을 돕기 위해 분비물이 나오게 되는데 으름덩굴의 암꽃도 암술머리에서 끈적한 진액이 흘러나온다. 수꽃의 꽃가루가 잘 붙을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나리나 백합처럼 암술이 큰 식물의 경우,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암술의 끝 부분을 손으로 살짝 만져보면 끈적거림이 느껴진다.
그러한 끈적거림이 있기에, 바람 따라 이리저리 떠돌던 수꽃의 꽃가루가 암술의 끝 부분을 살짝 스치기만 하여도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고, 비로소 식물의 사랑은 결실을 본다. 이렇게 수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달라붙는 것을 `수분(受粉)'이라 하고 수분 후에는 곧바로 수정(受精)이 이루어지며, 이 시기에 암술머리의 분비물도 서서히 말라간다.
으름덩굴은 잎이 꽤 예쁘다. 달걀꼴의 작은 잎이 다섯 장씩 손바닥 모양으로 달리며, 묵은 가지에서는 모여 달리고 새 가지에서는 어긋나기로 달린다. 으름덩굴은 암수 한 나무이지만, 암꽃과 수꽃이 따로 달리며 수꽃과 비교하면 암꽃이 수가 적고, 꽃 크기는 수꽃보다 암꽃이 월등히 크다. 조금만 관심 두면 전국 각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덩굴성 식물이라 그런지 가정에서 가꾸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화분에다 직접 종자를 발아시켜 상부를 다듬으면서 줄기를 굵게 키워주면 꼿꼿하게 설 수 있고 꽤 큰 꽃 덩어리들이 주렁주렁 많이 달려 보기도 좋을뿐더러, 향기 역시 은은하여 온 집안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깊숙하고 아늑하므로 관상용으로도 손색이 없겠다. 보랏빛 꽃봉오리는 꽃자루까지 따서 그늘에 말려 차로 즐기는데 꽃차 중에서도 고급 꽃차에 속한다.
열매는 키위와 비슷한 색깔을 가졌으며, 크기도 제법 크고 양도 많이 달린다. 충분히 익게 되면 저절로 껍질이 터져 그 속에서 달콤한 향내가 왈칵 쏟아져 나오며, 한국의 바나나라 불리는 만큼 과육은 달달한 맛을 낸다. 어린 시절 우리에겐 산골에서 즐겨 따먹던 자연의 간식이기도 했다.
작년엔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다시 먹어봤는데 그 시절 그 열매가 영 아니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달달함을 제대로 즐기기도 전에 한입 꽉 차게 씹히는 그 엄청난 숫자의 씨앗들이 아마 백여 개는 거뜬히 넘을 것만 같았다. 아무튼, 과육 풍부한 과일들에 익숙한 요즘엔 씨앗 때문에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 입안에서 대충 우물거리다 보면 삼킨 것도 없이 연신 까만 알 뱉어내기 바쁘니까.
주말엔 숲으로 가자. 추위가 완전히 물러나고 태양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는 5월의 숲은, 짝을 찾는 산새들의 지저귐도 예쁘고, 갖가지 식물도 향기 피워 유혹하고 있으니 일상을 떠나 마음껏 빠져주자. 연초록 고운 잎이 손짓하는 그 숲, 그 향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