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인지 풀밭인지, 간간이 박힌 흰색을 제외하고는 온통 연한 녹색이다. 원목테이블 위의 녹색이니 분명 풀밭이 맞다. 풀밭이니 뿌리는 보이지 않고 잎사귀만 보인다.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때깔은 바로 침이 고이게 하고, 침이 고임과 동시에 젓가락을 집어들게 한다. 밥공기가 자리하기도 전에 자그마한 잎사귀를 뭉텅 입안으로 들여 자근자근 씹는다.
“쓰다. 써!”, “겨울을 이겨낸 녀석들이니 얼마나 쓰겠어?”, “아니 이 녀석은 워낙 쓰거든”,“그래도 정말 맛있다”. 입안의 침이 계속 고이게 하는 쌉싸름한 맛, 쌉싸름함 뒤에 고소한 맛, 분명 참기름의 고소한 맛은 아니다. 씹을수록 혀가 아닌 치아가 전달하는 고소함이다. 또 한 젓가락 뭉텅 입으로, 여리다. 잇몸으로 씹어도 될 만한 부드러운 이 맛. 뽀득뽀득한 식감 뒤의 부드럽고도 깨끗한 맛. 색은 다 녹색인데 맛은 다 다르다. 코와 혀, 입안의 모든 것들이 느끼는 맛도 다르다.
예전 할머니는 이맘때면 칭칭 동여맨 광목행주치마를 마당에 풀어헤쳤다. 온통 녹색의 어린잎을 풀어내고, 손톱 밑이 까매진 손으로 하나하나 가리고 골라내었다. 그리고 차려진 밥상은 싱그러운 봄의 숲이고 들이었다.
그때의 홑잎을 매년 이맘때 똑같이 즐긴다. 집안에 두 그루가 매년 몸집을 키웠고 잎을 많이 달았다. 아내가 조물조물 무쳐내는 홑잎나물은 어릴 적 할머니의 홑잎나물이다. 할머니의 홑잎나물은 뽀득뽀득한 식감에 부드럽고, 고소했다. 손주한테 먹이려 가파른 산을 올라, 부은 손가락 마디로 새순을 하나하나 정성껏 따낸 마음이다. 그 맛을 올해도 기억한다. 소금간만으로도 달고 고소한 맛.
할머니는 뒤꼍에 머위를 심었다. 엄마는 머윗대를 잘라 껍질을 벗겨 들기름에 볶아 반찬으로 내어주셨는데, 그 머위가 지천으로 퍼졌다. 머위는 매년 새순을 올리고 새순을 따서 데쳐 된장으로 버무려 반찬으로 낸다. 오가피의 쌉싸름한 맛과는 다른 두툼하고 입안에서 오래 머무르는 건강한 맛이다. 아침에는 오가피에 겨우내 자란 쪽파로 묻힌 나물, 밥한 술에 한 젓가락, 입안에서 오물거린다. 감칠맛이 더해진다.
매년 5월 이전의 봄은 늘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를 거듭할수록 옮겨지는 종류는 많아지고 이젠 너른 들녘의 풀밭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한겨울 눈 속에서도 풋풋함을 잃지 않았던 샐러리, 이탈리안 파슬리, 적겨자 잎, 돌미나리가 무성하게 자랐고, 방풍, 참나물, 취나물, 쑥이 겨우내 얼었던 땅을 비집고 쑥쑥 자라났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든 작디작든 씨앗이 싹을 틔우고 숙근초가 되어 매년 지천으로 퍼지더니, 매일 밥상까지 점유한다.
겨울을 지나 더 비대해진 쪽파가 텃밭 가득하니 파전에도 쪽파가 즐비해 틈이 안 보인다. 씹기 전부터 입안에서 달고 달다. 아삭아삭한 식감, 오물거릴수록 깊은맛을 전하여 이젠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맛이다. 매년 봄이면 더욱 부지런히 따다가 무쳐주고 끓여주고 부쳐주고 떡으로 만들어 주니 건강하지 않을 수 없을 터, 누구의 아내인지 참으로 이쁘다.
참두릅이나 엄나무, 뽕잎 순은 아직 몽우리 상태라 밥상으로 옮겨지기에는 이른 시기, 세상은 작은 싹이 땅에서 나무에서 틔어 그려내는 올리브그린의 수채화. 코발트블루와 울트라마린의 중간쯤 되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낸 그림은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운 색의 향연이다. 겨우내 칙칙했던 소나무도 올리브색의 기운으로 시작하고, 화려하지 않은 연한 순과 같은 잔잔한 색의 꽃을 함께 올리는 나무들이 온 산을 뒤덮는 시기는 푹신함과 아련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 아랫부분, 들녘의 세상에서 자란 어린싹들은 더불어 사는 것들에게 내어주기 바쁘다. 연한 순을 올려 그려낸 세상은 눈에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가슴으로 들어오고, 정성어린 손과 마음을 통해 몸으로 들어와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