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무에 기생하지 않지만, 한 줄기로는 설 자신이 없어, 여러 갈래로 성장하는 식물이 있다. 바닥을 기어 자라기도 하지만, 버팀목에 의지해 자라는 식물이다. 흡착 식물은 그나마 벽을 타지만, 흡착판이 없는 식물은 주변에 버팀목이 없으면 끊임없이 바닥을 긴다. 그러다 의지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잡고 탄다.
어디서 날아든 씨앗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싹이 자라더니 기고기어 결국 담장에 이르렀고 한 무더기의 세력을 가졌다. 해를 거듭하며 꽃을 피웠고, 벌을 불러들였다. 젓가락보다도 가는 실오라기 같은 넝쿨이 굵어져 엄지손가락보다 굵은, 제법 힘 있는 목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녀석이 되었다.
어떻게 저런 굵기가 되었을까? 실오라기 같은 볼품없는 줄기였고,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부러질 듯 여렸는데, 녀석들은 많은 줄기를 내어 서로 얽혀 의지했다. 서로 의지해 바람을 이겨냈고 버티며 단단해진 것이다. 행여 바람에 날려 부러지면, 부러진 자리에서 더 많은 싹을 틔웠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해, 이젠 묵은 연륜을 자랑하며 때깔 좋은 목피를 가졌다. 풀이 나무가 된 녀석은 좋은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고생했기에 또 다른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올해도 여느 해와 같이 금은색의 작은 꽃무리를 자랑하며, 벌을 불러들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멈춰 세울 인동초다.
또 한 녀석, 바람에 날려 운 좋게 그네 다리가 박힌 부근에 뿌리를 내려 해마다 보라색 꽃을 피운다. 씨앗으로는 쉽게 번식이 안 되는, 발아가 되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 녀석인데, 조그마한 뜰에 어울려 살려고 날아들었나 싶다. 더욱이 버팀목이 되어준 그네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듯, 손바닥보다 큰 벨벳으로 치장해주는 녀석이다.
해를 거듭해도 매년 실오라기 정도의 가녀린 줄기지만, 피워내는 꽃은 가히 놀라울 정도로 크고 화려하다. 왜소한 줄기에 어떻게 저런 커다란 꽃을 달고 버틸 수 있을까? 역시 버팀목을 의지하고 있지만 한 줄기가 아닌 여러 갈래의 줄기가 서로 얽혀 있다. 많은 눈에 거센 바람에 커다란 가지는 꺾였는데, 이 녀석은 용케 버티고 마디마디에서 새순을 내고, 매년 세력을 키워 많은 수의 꽃눈을 곧추세웠다. 혹한의 겨울을 버틴 대견한 마음을 서로 나누며, 위안이 된다. 왜소한 외형이지만, 단단하고 질긴 클레마티스다.
회색의 거친 시멘트벽에 잔금이 간 듯 담쟁이의 세력을 아래로 두고, 쭉쭉 뻗어나가는 또 하나의 세력. 분명 아랫둥이는 묵을 대로 묵어 고목이 된 듯한데, 해마다 내는 새순은 여린 넌출 줄기다. 여러 갈래의 넌출이 서로 칭칭 두르며 기어올라 해를 거듭하면서 나무가 되는 녀석, 여린 순으로 시작되어 나무가 되었기에 속은 어느 나무보다도 질기다. 질기고 질겨 구부러지되 부러지는 경우가 없다. 힘들게 자리하면서 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로 보라색 꽃을 달아 벌을 불러들이고 씨앗을 맺는다. 가는 줄기지만 질긴 특성이 있는 등나무다.
새순의 넌출이 모두 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부러지는 여린 줄기이기에 서로 의지해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의지할 버팀목이 있다면, 타고 오를 흡착판과 잔뿌리가 있다면 오르지 못할 것이 없지만, 이도 저도 없기에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능소화나 담쟁이보다 갖지 못한 부족한 여건 속에서 풀이 아닌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의지뿐이다. 그리하여 꽃을 피우고 벌을 불러들여 씨앗을 맺는다. 씨앗은 서로를 의지하며 이겨낸 노력의 산물이고 희열이다. 그리고 희열의 순간을 지속하고자 또 다른 더 알차고 다부진 씨앗을 만들어 낸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한다. 씨앗은 희망이다. 어떠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이겨낸 결과의 씨앗이니 그 희망은 창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