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을 벗어난 버스 여행에 모두 신이 났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풀이 죽고 기가 죽어 도착한 곳,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창을 벗어나 가 본 그곳 강릉은 초여름이었는데도 무척 더웠다. 대회가 열리는 경연장에 도착했고 약간의 발성연습을 한 후 곧바로 점심때였는데, 우리 차례는 점심 후였다. 다 함께 경연장을 나와 근처 골목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뭐 먹겠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몇몇 아이들이 이것저것 음식이름을 불렀다. 그 몇몇 아이들은 평창읍내에 거주하는 비교적 잘나가는 집안 자녀였다. 이것저것 음식 이름이 나왔지만, 선생님은 통일하라고 하셨다. 뭔지는 모르지만 제일 기가 살아 당당한 몇몇에 의해 점심은 한가지로 통일되었다.
그러고 보니 출발해서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회비를 내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는 데 대한,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다는 데 대한 일종의 미안함이 상당히 주눅 들게 했다. 출발 전 선생님이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아이들도 모두 알았고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와! 생전 처음 본 음식. 둥글고 길쭉한 그릇에 감싸놓은 노란색 위로 빨간색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이 내 앞에도 놓였다. 매일 시커멓고 푹 퍼진 보리밥과 김치만 먹던 나에게 오므라이스는 정말 놀라운 음식이었다.
“이야! 오므라이스다.” 한 아이가 소리쳤고 아, 이게 오므라이스라는 거구나. 생각했다. 다들 어서 먹자는 선생님 말씀에 모두 먹기 시작했다. 나도 쭈뼛거리며 막 숟가락을 들었을 때 들려온 여선생님의 앙칼진 소리. “야! 넌 회비 안 냈으니 먹지도 마!” 흠칫해서 들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치 보며 밖으로 나왔고 속에서 울컥 덩어리가 올라왔다. 이제껏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그 이후는 전혀 기억이 없다. 오는 길에 경포대를 들러 모두 내리라는 말에 같이 내리긴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바다도 처음이었는데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도 줍고 모두 함께 단체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강릉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평창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피곤했는지 대부분 잠들었지만 나는 창밖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배도 고팠다.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다. 오므라이스, 이다음에 커서 돈 많이 벌면 꼭 먹어봐야지.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 강릉 경연대회의 기념사진이랑 경포대에서의 단체사진이 나왔는데 회비를 내지 않은 이유로 아쉽게도 기념사진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받은 사진을 아주 잠깐 보기는 했는데, 짙은 청색 베레모에 세일러복 스타일의 합창복을 입고 단원들 속에 섞여 있는 나의 모습은 꽤 예뻤다.
요즘 농부는 겨울에도 바쁘다. 우리 농장 뜨렌비는 주작목이 레몬나무를 비롯해 커피나무 등 아열대작물이고 보니 4계절 손이 가고, 오히려 겨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행여 난방기가 작동하지 않는 날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수시로 들여다봐야 하고 온도도 체크해야 된다. 게다가 요즘은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다. 총 14회 과정으로 매주 2회 충청대학교를 오가며 브랜드 개발 및 디자인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후다닥 농장을 정리하고 나섰다.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강의 들으려면 든든히 먹어야 한다.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이나 한 줄 먹고 들어가야겠다 생각하면서 메뉴판을 보는데 오므라이스가 적혀 있다. 아! 맞다. 오므라이스! “사장님! 오므라이스 주세요.”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오므라이스를 40여년이 지난 이제서 먹는다. 여전히 길쭉한 그릇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