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노래 부르는 걸 무척 좋아했다. 국민 학교 3학년 내내 합창 연습실을 기웃거리며 합창단을 부러워했다. 이듬해인 4학년 초 신입단원을 모집했다. 합창단의 단체복 구입비용이 적지 않았는데, 그 시절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으므로 허락할 리 만무한 걸 알기에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엄마를 졸라봤다.
어김없이 엄마는 꿈도 꾸지 말라 했다. “엄마! 대신 주산학원 안 다니면 되잖아”. 엄마는 매일 꾀꼬리처럼 노래는 불러 뭣에 쓰겠냐며 얌전히 주산학원이나 다니라 했다. 열심히 익혀서 은행원이 되라고. 엄마는 은행원이면 여자로서 제일 출세하는 것으로 믿었고, 농협의 여직원을 대할 때마다 그 뜻은 더욱 굳건하셨다.
졸졸 따라다니며 졸라도 보고, 엉엉 울며 애원도 해봤지만,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가? 예나 지금이나 한 번 하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다 보니, 어느 날 용기 좋게 엄마의 허락 없이 저질렀다.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고 약간의 테스트를 거쳐 발탁되었다. 드디어 평창국민학교의 합창 단원이 되었고 그때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물론, 엄마는 모르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창군내 국민학교 합창경연대회가 있었다. 경연대회는 단체복을 입어야 했으므로 할 수 없이 엄마한테 이야길 해야 했고, 예상대로 엄마는 사줄 수 없다고 하셨다. 금액은 기억이 안 나는데 맞춤복이니 그 금액이 꽤 컸을 테다. 모두 단체복 비용을 냈는데 나만 못 내어 담당 선생님은 짜증을 냈다. 매일매일 눈치를 줬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그러잖아도 소심한데다,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대회일은 가까워 오고 내가 맡은 부분은 하이소프라노였는데 하이소프라노엔 모두 네 명뿐이어서 어떻게 한 명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엄마는 십리 길의 학교에 불려와 다음날 돈을 구해서 아이 편에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가셨다. 그날 저녁, 엄마한테 죽어라 혼났고 지 맘대로 했다고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그때의 엄마들은 대부분 애들을 패고 길렀으니까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긴 맞을 짓도 했지. 그래도 난 몸으로 때우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큰 금액의 단체복을 사주셔야만 했다. 그런 거와는 상관없이 나는 신이 났다. 새로운 노래도 많이 배웠고 또 폼나는 합창복도 있었으니까. 벽에 걸어놓고 쳐다만 봐도 즐거웠다. 정말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살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얼마 후 군내 경연대회를 무사히 마쳤고 성적은 우리 학교가 제일 우수하여 다시 도내 경연대회에 평창군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 대회는 강원도 강릉에서 있었기에 우리는 모두 강릉으로 가야만 했다. 왕복 교통비랑 식비 합하여 2800원을 내란다. 또 돈!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앨범을 내고 정상에 오르기까지 피나는 노력과 함께 그에 따르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여튼 그놈의 돈이란 건 대체 무엇이기에, 싹 다 어디로 가 있기에 우리 집엔 그리도 없었는지…. 며칠을 떼쓰고 졸랐지만 매일 울기만 했지 성과가 없었다. 그렇게 합창 경연 일이 다가왔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나의 참가비는 엄마의 고집 탓에 결국 내질 못했다. 아니 고집이 아니라, 어쩌면 정말 우리 집에는 그 돈이 없었나 보다. 추측하기에 그날의 내 비용은 담당 선생님이 내주신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고마운 줄 알라 소리 질렀던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