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분을 보았다. 마른 체구에 구부정하게 등이 휘고 허름해 보이는 노인, 전에도 같은 모습을 본 적 있다. 쌀쌀한 이 밤에, 짐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앞에 두고 자동판매기 옆,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 설은 타향에 / 외로운 맘 그지없이 나 홀로 서러워 / 그리워라 나 살던 곳 사랑하는 부모형제 / 꿈길에도 방황하는 내 정든 옛 고향 (`여수' 中)
어릴 적 엄마가 부르던 노래 한 소절, 때 아닌 `가을밤'을 흥얼거린다. 골목길 외등이 시야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고 있다. 노랫말 속의 그 밤은 지금 같은 밤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다. 아니, 결혼 전으로 기억되는 걸 보니 까마득하다.
스물셋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집안의 맏며느리 역할과 책임을 수행해야 하고, 이 나라의 조신한 아녀자로서 소임을 다하느라 음주가무는 가급적 멀리 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금은 많이 달라져 술이란 것이 남녀 구분없이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문화가 되었고, 적당한 음주는 혈액 순환을 돕는다 했으니 건강 해칠 정도의 과음이 아니라면 가끔 이렇게 한 잔씩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집으로 향하는 발길에 두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취기로 인한 어수선함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두어 병의 맥주가 이렇게 사람을 다르게 만들 줄이야. 길을 걸으며 큰 소리로 중얼거릴 수 있게 하고, 흥얼흥얼 노래도 부르게 하며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동을 망설임 없이 하고 있으니, 이것은 술 때문일까? 30여년 세월 때문일까? 어쨌건 스물셋의 처자 그 사이 많이 변했다. 아! 그래서 다들 일정 끝나면 술집으로 향하는 것인가! 약간의 어수선함을 핑계로 꼿꼿하게 지탱하던 몸을 흔들리게 내버려 두고, 참았던 감정을 토로하기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원 없이 하고파서... 아줌마들의 끊임없는 수다도 그렇고, 퇴근 무렵 직장인들의 발길이 술집으로 향하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을 거둠을 끝냈다. 지난 주말엔 콩도 털었다. 올해는 법인 사업의 하나로 농산물 가공사업장 꾸미느라 연초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꼼꼼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만큼 커다란 막힘없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이 되었음에도, 그간 덩어리 하나 품고 있던 느낌인 걸 보면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었나 보다. 결정하고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그 나름의 심리적 부담이 있었을 테지. 이제 시설 공사도 끝났고 기본적인 준비가 되었으니 앞으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함은 물론, 끊임없이 연구하고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저 어르신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일까? 전에도 같은 모습이었다. 늦은 시간 이 골목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저렇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닥 차가우니 뭐라도 깔고 앉으시라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고단함에 밀려드는 잠을 쫓아내기 위함일까? 잠시 쉬고파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싸늘한 밤 공기에 식어지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덥혀 보기 위함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칼이 하얘진 연세에도 그리고 차갑기만 한 이 밤에도 날이 밝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 봐 한밤중에 폐지를 거두시는 그분의 모습에서 우리 엄마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 설은 타향에 / 외로운 맘 그지없이 나 홀로 서러워 / 그리워라 나 살던 곳 사랑하는 부모형제 / 꿈길에도 방황하는 내정든 옛 고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