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를 1%로 보든, 10%로 보든, 넉넉잡아 30%로 보든 간에,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게 못마땅하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듯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존재감을 느껴야만 살아가는 맛을 느낄 텐데, 괜스레 잔칫상 벌이는 남들 들러리만 서고 있다는 기분이 들면 자신을 종잡을 수 없게 되지요.
요즘 시네마를 들썩거리게 만들고 있는 토드 필립 감독의 영화 ‘조커(Joker, 2019)’를 보았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은 어릴 적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했지만, 그리되지는 못했습니다. 출신, 질병, 능력 등이 다 발목만 붙잡았던 겁니다. 그의 존재감은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지요.
애당초 농담(joke)은 그저 농담일 뿐인데, 어떤 농담이 환영받지 못하는 농담이 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밀란 쿤데라의 말로 하자면,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사람이 따로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아서의 농담이 그런 몹쓸 취급을 받았던 겁니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라는 아서의 슬픈 생각은 한번 터지면 멈추는 게 힘들었던 그의 웃음소리의 원인과 직결되어 있었을 겁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던 거지요. 제 기억으론 그가 한번인가는 막 웃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잔기침도 없이 웃음을 멈추었던 장면이 있었는데, 순간 오싹해졌답니다.
해고를 당하고는 파리목숨이 된 채 짐을 싸서 나오다가 계단 출입구에 적힌 “웃으세요(Don‘t forget to smile)”라는 문장을 “웃지 마(Don’t smile)”로 고칠 만큼 참을 수 없는 분노의 임계점을 지나치고만 아서의 잔혹한 이야기로 화면은 가득 채워졌습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라는 황현산의 어법을 적용했을 때, 패배적으로 파괴의 무기를 사용한 이 영화는 시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시적인 자리를 거부하면서까지 이 영화가 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단호했다고 보고 싶군요.
1. 부디 망상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2. 부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3. 부디 가난한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4. 부디 학교 가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소홀히 다루지 마세요.
5. 부디 담배연기를 논외로 하진 말아주세요.
6. 부디 다른 사람들을 투명인간 대하듯이 하지 마세요.
7. 부디 이해까지는 못하더라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8. 부디 폭력의 미학을 운운하지 마세요.
영화의 몇 장면에서 아서의 어딘가 엉성하면서도 뭔가를 훌훌 털어버리는 듯한 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춤이란 건 말이오. 마음의 물결이 몸을 통해 밖으로 넘쳐 나온 파도라오”라고 조르바가 했던 말이 그 춤을 받아들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울한 게 싫다”고 고백하던 아서의 모습이 내내 잊혀지지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