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토요일에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가본 적이 없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은 고속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늘 난항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지하철과 시내버스나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는 일이 적잖이 고달팠거든요.
이번엔 그닥 큰 해프닝은 없었지만, 지하철에서 교통카드를 쓰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카드가 제대로 읽히지 않아 헤매고 있었는데, 뒤에서 기다리던 낯모르는 어떤 서울 누님이 그러시더군요. “어휴, 거기다 카드를 대면 어떡해요.”
그렇게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제가 그만 호사를 누리고 말았습니다. 점심 전에 들렀던 구구갤러리에선 눈 호강을 했고, 저녁 전에 들렀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귀 호강을 했던 겁니다. 눈과 귀가 다 홀려서 온통 마음이 흔들려버린 하루를 보낸 겁니다.
구구갤러리에선 아작의 초대전을 보았습니다.
아작의 작품 `꽃은 아프지 않게 사라지는 방법을 알까(흩어지는 낮)'앞에선 한참이나 꼼짝할 수 없었죠.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그림 속의 여자는 눈을 감지 않은 채 홍조 띤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꽃으로 만들어진 치마에선 꽃잎들이 나비처럼 두둥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밤을 달래고 아침을 지나쳐서 눈부시게 흩어지는 낮”과도 같았지요.
작가는 “누군가를 껴안아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아프게 사라지곤 하다가, “꽃의 상냥함”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작가의 분신 같은 그림들 앞에서 마구 상냥해졌고, 삶의 기나긴 통증을 잊을 만큼 황홀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안산시립합창단의 제63회 정기연주회를 보았습니다. `아카펠라 코러스의 융합 무대(fusion stage)'를 거의 100분에 걸쳐 경험했습니다. 탄식, 숨소리, 중얼거림, 손가락 튕기기, 물이 담긴 유리잔 문지르기, 휘파람, 손뼉, 발 구르기, 춤 등이 무반주의 목소리들과 맞물려서 마법과 같은 선율이 흘렀습니다.
불행과 불안의 늪에 빠져 비탄의 심정으로 바닥을 치고 있던 어떤 관객들에겐 상실했던 신앙의 힘마저도 회복시켜 줄 만한 `음악적 미사(mittere)'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곡가들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박신화 지휘자와 단원들이 쏟았을 그동안의 흥건한 땀방울이 저절로 느껴졌답니다. 그들 모두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연습한 결과일 겁니다.
무반주 합창으로 들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은 적절한 유머까지 겸비된 명불허전의 메뉴였지요.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가 제 배를 두드리고 제 발로 땅을 구르며 흥겹게 노래한 것 같은 `고복격양(鼓腹擊壤)의 시간이 되어서 구름사탕을 손에 든 아이처럼 기뻤답니다.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