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의문사(疑問死)는 처리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쩌면 타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혀버리는 일들이 역사를 통해 반복되고 있는 듯하군요.
뒤늦게 `증인(Innocent Witness, 2018)'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사건 현장의 이웃에 있었는데, 자기 내면세계에 갇힌 자폐아인 지우였습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자기 내면의 갈등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살아있던 민변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 순호는 살인 용의자의 변론을 맡게 되었고요. 세상의 이목이 모아진 사건은 돈이 필요했던 순호에겐 파트너 변호사가 될 수 있는 문고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순호의 역량은 뛰어났습니다. 검찰 측 증인이었던 지우를 정신병자로 매도하면서까지 단숨에 용의자의 무죄를 이끌어냈으니까요. 이에 불복한 검찰 측은 항소를 했고, 공교롭게도 1심 판결 후 용의자의 살인을 알게 된 순호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변호인으로서 의뢰인의 비밀을 유지할 의무가 있던 순호가 2심 법정에서 선택한 것은 자신의 양심이었습니다. 변호인이 검사인양 돌변해 살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버린 법정은 패닉 상태가 되었지요. 순호를 진실의 편으로 돌아서게 만든 것은 지우의 짧은 물음이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말투는 어눌했지만, 조준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때묻지 않은(innocent)' 지우가 증인으로서 진실의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순호는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고 울컥했습니다. 명백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자살자로 둔갑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돈이 변론의 향방을 결정짓는 대형 로펌의 비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인륜은 안중에도 없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만들어내는 속물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정상(正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정상(非正常)의 세계를 무시해버리는 세태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가뭄의 단비처럼 `좋은 사마리아인들(Good Samaritans)'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우와 순호도 좋은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지우의 엄마와 순호의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지우와 소통할 줄 알았던 검사 희중과 순호의 오랜 친구 수인도 좋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전작 영화 `완득이(Punch, 2011)'와 `우아한 거짓말(Thread of Lies, 2014)'을 통해서도 소중한 사람들을 찾아내 아픈 데를 감싸주었던 이한 감독이 신약성경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좋은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던졌던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계속 붙들고 있던 것 같군요.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