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ㄴ데'
어미 `-ㄴ데'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7.12.28 1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2011년 12월 19일.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119에 전화를 걸었는데 소방관들이 도지사 예우를 하지 않아 화가 잔뜩 났다. 여덟 번에 걸쳐, `나 김문순데', `나 도지산데'를 반복했지만 소방관들은 도지사가 119에 전화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용건도 없이 `김문순데'만 반복했으니 소방관이 전화를 잘못 받았다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화가 난 김 전 지사는 소방관 두 명을 징계 삼아 멀리 좌천시켰다. 사건이 알려지고 여론이 악화되자 김 전 지사는 슬그머니 이들을 복귀시켰다.

2014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학생 등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 속으로 기울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일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 웬일인지 승객은 구조하지 않고 동영상만 열심히 찍었다. 누군가 `여기 청와댄데'하면서 VIP(박근혜 전 대통령) 보고용 동영상을 보내라고 닦달했기 때문이다. 사고 현장을 촬영하느라 1시간 50분의 골든타임을 모두 허비했고 세월호는 가라앉아 304명이 희생되었다. 해경 123정 정장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왜 선체에 진입하지 않았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정장은 깜빡 잊었다고 말해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20대 초반. 군대 간 친구를 면회하러 강원도 인제의 어느 계곡에 있는 포병 부대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녀석이 좋아하던 체리브랜디 두 병을 들고. 하필 훈련 중이라 부대는 텅 비어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고 어둠은 점차 짙어지는데 불쌍한 청춘 하나가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으니 딱하게 여긴 위병소 초병이 녀석과의 관계를 물었다. 나는 낮고 처연한 목소리로 `친군데요'라고 답했다. 그는 몇 군데 전화를 걸었고 한참 후 거짓말처럼 녀석이 지프를 타고 나타났다. 얼굴에 까만 위장 크림을 잔뜩 바른 채.

우리말은 어미와 조사가 다양하게 발달했다. 어미(語尾)는 용언의 어간과 서술어 `이다'의 어간에 붙어 다양하게 활용된다. `가다'라는 동사의 경우 `가니', `가서', `가며', `가고', `가는데'등으로 활용하는데 이때 `-니', `-서', `-며', `-고', `-는데'등이 어미다. 외국인이 국어를 어렵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어미와 조사가 특정 담화 맥락과 결합하면 본래의 의미와 완전히 달라진다는 데 있다. `친군데요'라는 말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어조로,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린다.

여기 청와댄데. 나 같은 소시민은 평생 이 말을 들을 일 없겠지만 고위 관료와 재벌 등 사회 지도층은 다르다. 이 말을 문법으로 풀어쓰면 `여기 청와대이다. 그런데'가 된다. 하지만 담화의 맥락을 고려하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어미 `-ㄴ데'가 청와대나 국정원 등 거대 권력기관과 결합하면 듣는 이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하다. 오죽하면 승객을 구조하러 간 해경 123정 정장이 구조 임무를 다 잊어버렸을까.

얼마 전 충북 제천의 스포츠 센터에 화재가 발생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 경찰이 현장을 통제해 감식 요원이 아니면 유족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권석창 국회의원이 통제를 무시하고 난입했다. 경찰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압박을 가할 때 그가 사용한 어미 또한 `-ㄴ데'였다. 도지사, 청와대, 국회의원 등 힘센 권력이 어미 `-ㄴ데'와 결합해 나를 압박해 오면 나는 `그래서 어쩌라고?'로 맞받아칠 수 있을까. 함박눈이 내리던, 그 옛날 초병은 `친군데요'라는 내 말을 어떻게 들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