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구멍
숨구멍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4.06.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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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백화점의 가방을 점찍어 놓고 날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 회사를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가 더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답은 백화점 가방을 매일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몇 달만 더 모으면 가방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힘든 직장생활을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빚쟁이 컨셉으로 방송가를 종횡무진하던 어느 가수가 최근 69억원의 빚을 청산해서 화제가 되었다. 나랑은 아무 인연도 없는 그 가수 때문에 나는 세 번이씩이나 놀랐다. 먼저 그가 진 69억이라는 큰 빚에 놀랐고, 그가 파산신청을 하지 않고 그 많은 빚을 갚겠다고 했을 때 놀랐고, 드디어 그 빚을 다 갚았다고 했을 때 놀랐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20년 동안 하루 3시간씩만 잠을 자며 일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를 지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틈틈이 사 모은 수백켤레의 신발이 문제였다. 빚쟁이 주제에 왜 그렇게 많은 신발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 돈으로 빚부터 갚아야 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인정은 없는 말이다. 그런 낙이라도 없었다면 그는 무슨 힘으로 그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아야한다는 말이 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 있다는 것이다. 쥐는 고작 고양이를 물고 말겠지만 사람은 자기를 몰아붙인 사람을 물거나, 도망갈 곳 없는 스스로를 물지도 모른다. 그에게 신발은 쥐구멍이며 숨구멍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정육점을 하는 친구가 있다. 지금은 가게를 넓혀 제법 큰 정육점을 하고 있지만 처음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안심, 등심, 갈빗살, 안창살, 죽은 짐승들을 난도질 하며 사는 것도 비위에 맞지 않았지만 집안에 우환이 생길 때마다 살생에 대한 업보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그 친구가 찾아낸 숨구멍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따라 다니는 것이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는 뒷전이고 돈 한 푼 안 생기는 가수만 따라다닌다며 남편은 핀잔을 했지만 어찌되었든 친구는 그 뒤로 마음을 잡아 가게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다.

나도 늦은 나이까지 몸을 쓰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사랑하는 가족의 힘이었다. 딸의 생활계획표를 몰래 훔쳐본 적이 있다. “엄마 웃게 해줘야지. 이러면 안 돼.” “엄마 예쁜 옷 사줘야지. 정신 차려.” 딸은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날에는 이런 글을 써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딸의 그 예쁜 마음이 주저앉으려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곤 했다.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많이 미안해하며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준 남편의 힘도 컸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가 늘어나는 요즘은 살아가는 힘을 가까운 가족에게서만 찾는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기대려고 할 때 그 중 누군가는 분명 버거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가 있는 인생에서 그들이 끝까지 내 곁에 머물러 줄 수 있겠느냐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다소 버거운 작업인 글쓰기를 미련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나에게 글쓰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수 있는 일이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만 해내야 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글 쓰는 순간만큼은 잡다한 잡념은 끼어들 생각도 못하니 이보다 좋은 정신수양은 없을 듯하다. 긴 세월 살아오면서 찾아낸 나의 숨구멍, 그 구멍에 볕들 날도 있으리란 발칙한 기대 또한 놓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의 내 삶은 맑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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