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부부 이야기
어느 노부부 이야기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4.06.1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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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사람을 정화하는 풍경이 있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순간, 또는 운무에 덮인 산사에서 종소리를 들을 때 같은 장면들이다.

빛과 여백은 화려한 색이 없지만 마음이 허해질 때면 그 풍경에 빠져 피안의 세계를 산책하고 싶은 유혹으로 밀려가기도 한다.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높은 구두를 신은 것도 아니다. 험한 곳도 아닌, 집 마당에서 오지게 넘어졌다.

손가락뼈가 탈골되고 인대가 엉망이 되었다. 양쪽 무릎은 상처가 나서 청바지 위로 핏물이 배었다.

왜 넘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수술하고 입원했다.

병원은 낯설고 서먹한 장소다. 병실에는 여자 네 명이 함께 있다.

손을 다친 건 나 혼자였고 세 사람은 다리 수술을 했다.

사흘쯤 지나자, 통증이 잦아들어 순하게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를 정화 시켜주는 풍경을 만났다.

자연이 주는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잔잔하고 따듯한 풍경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그분은 하루 늦게 내 옆자리에 입원해 무릎관절 수술을 했다.

흰머리는 새카맣게 염색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고랑을 이룬 소박하고 다소 촌스러운 할머니다. 그래도 표정은 소녀처럼 맑고 환하다.

이른 새벽이면 그분의 남편이 전화하신다. 밤새 아프지 않고 잠은 좀 잤느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다.

응석으로 화답하는 아내의 말투가 잠을 쫓는다.

본의 아니게 새벽마다 노부부의 대화를 엿듣는다. 낮에 병실에 들러 늙은 아내를 다독이고 저녁에도 들려 한참 동안 아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집으로 간다.

어찌 저리도 부부 사이가 좋을까. 이만큼 살았으면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내게는 충격이었다.

스물세 살에 두 살 위의 농촌총각인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첫눈에 반해 2년 연애하고 결혼했단다. 시댁에 얹혀살면서 시집살이도 오지게 겪었다.

남편의 직업이 뚜렷하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지금까지도 자신이 공장과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살림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동안 남편은 술에 젖어 살고 결국에는 간암까지 생겼단다. 그래도 남편이 밉지 않다고 했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이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더란다.

아내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남편이라도 곁에 있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평생 비행기 한 번 타지 못하고 제주도에도 가보지 못했어도 조금도 아쉽지 않다는 그분을 바라보며 나는 천연기념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변화무쌍한 삶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삶이 출렁일 적마다 빈 껍질처럼 느껴지고 무력해진다. 쓸쓸한 고독에서 벗어나려 어디론가 자꾸 떠나려 한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가슴에 바람이 들기 시작하면 결국 집을 떠나 허기를 채워야 한동안 편안하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그리운 곳과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을 안고 살았고 그분은 따듯한 등불을 밝히고 살았다. 살아내는 일은 결국 사랑을 잡고 사는 일, 병실에서 만난 노부부가 나를 정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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