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위성
인공 위성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4.06.1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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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친구와 둘이 갔던 남원 여행은 유달리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저녁에야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 산책하러 나와보니, 근처에 있는 야외 공연장에서 마침 한여름 밤의 흥겨운 잔치가 한창이었다. 가족이며 지인들의 응원 열기가 이방인의 눈에 더욱 정겹게 보인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주인에게 주변에 산책길이 있는지 물었더니 마침 건물 뒤편에 좋은 곳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숲 그늘을 걷는 동안 지역 주민들을 여럿 만났다. 말없이 스쳐 지나는 것만으로도 남원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드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여름 볕이 따갑다 싶더니 언덕 위에 선 팔각정이 나타났는데 사방으로 트인 전망이 기가 막히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요천을 따라 자리 잡은 남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우리가 가야 할 광한루가 보이고 저 멀리에는 지리산까지 어렴풋이 보인다. 이후 방문한 광한루 곳곳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것은 먼 곳에서 바라본 이 선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여겼던 것은 지구가 그만큼 크기 때문인데, 보통 사람은 이 정도의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다. 충분히 먼 곳에서 바라보아야 드디어 `둥근 지구'를 보게 될 것이다. 인류 중 최초로 둥근 지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옛 소련의 조종사 유리 가가린이다. 1961년 4월 12일, 인공위성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주위를 돌며,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작 60여 년 전이라는 것이 놀랍다.

이번 `함께 성장 독서'는 높은 곳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았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인공위성을 타고 2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인류로부터 인지 혁명과 농업혁명을 거쳐 현재의 엄청난 과학과 기술 발전을 이루기까지의 인류 역사를 3주 동안 여행했다. 편평해 보였던 우리의 세계가 이제 인류 역사의 장(場)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입체감이 느껴진다. 우리의 여행이 가가린의 우주여행과 다른 점은 우주 탄생과 지구 탄생에서부터 인류의 탄생과 발전까지의 긴 시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여행이라는 점이다. 둥글고 푸른 지구를 바라보는 대신, 수많은 생명체 중에 우리 인류만이 가진 특별함과 우리가 거쳐온 큰 궤적들, 그리고 우리 앞에 펼쳐진 선택의 문제들을 바라보았다.

무한히 펼쳐져 있는 숲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나무에 오르거나 나무 둥치의 이끼를 살피고, 숲을 가로질러 가면서 또는 멈춰서 크고 작은 식물들을 들여다보고, 또는 숲을 빠져나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숲 전체를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간단한 방법은 가능한 한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독서는 세상을 보는 광각렌즈, 현미경이나 망원경, 또는 인공위성이 된다.

그러나 참다운 숲의 활력은 그렇게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전경을 파악한 경험은 소중하지만 결국 아래로 내려와 나무들과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그게 바로 숲의 제 모습을 만나는 것이다. 독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전망해 본 경험은 바닥에 자리한 현실에 돌아와서야 의미가 생긴다.

유리 가가린이 영원히 인공위성을 타고 있거나 그대로 우주의 별이 되었다면, 둥글고 푸른 지구에 대한 그의 경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공위성의 여행을 끝내고 지상에 다시 착륙한 순간의 감동을 내 멋대로 상상해 본다. 나도 `사피엔스'라는 인공위성에서 내려 이제 지면에 착륙해야 한다. 두 다리로 지면 위에 굳건히 서며 나를 둘러싼 밋밋하고 편평한 세상, 내 가까이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더 깊이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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