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벗게 하다
왕관을 벗게 하다
  • 김혜식(수필가)
  • 승인 2014.02.0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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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의 가요따라 세태따라
김혜식(수필가)

널빤지에 모래를 놓아 셈하는 토사주판은 기원전 3000∼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원조가 된 셈이다. 이렇듯 주판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주판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 또한 크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지난 2007년 11월 3일자 ‘세계를 바꾼 101가지 발명품’을 선정, 그 1위의 자리에 주판을 등극시켰다.

하지만 전자계산기 출현으로 주판은 인기를 잃고 설자리가 좁아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설 자리를 잃었던 구식 주판이 10여년 전엔 학원가에서 다시 부활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 구식 주판이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문득 참으로 간사한 것이 인간이구나 싶어진다. 입에 맞으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주판은 더하기와 빼기, 나누기 등을 셈했지만 신식 계산기처럼 빠르진 못했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그 주판기의 논리대로 행동양식과 사고가 단순했다. 하지만 행동과 사고는 순수하고 정확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구식 주판을 두들기고 살던 시절을 두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여긴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이렇다. 사물을 평가할 때도 ‘좋다’와 ‘나쁘다’, ‘맞다’와 ‘틀리다’를 확실히 구별할 줄 알았다. 1+1은 2가 되고, 10나누기 2는 5가 된다는 진리를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1+1은 1이 될 수도 있고, 10나누기 2는 10이 될 수도 있다는 자기 편의에 의한 이기적 주장을 하는 세상이 됐다. 일부이기는 하나 사회지도자층들이 특히 그런 논리대로 세상을 우롱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정의가 실종되고, 불신이 만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삶을 가늠함에는 잣대의 수치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남녀간의 사랑이야말로 신식 주판기보다 구식 주판기가 더 정확할 수가 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다. 지인의 딸이 선을 보는데 그 자리에서 상대방 부모의 직업을 몇 차례 확인하더란다. 마지못한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대그룹에서 은퇴 후 현재는 중소기업에 재취업해서 과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단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란다. 그리곤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만 일어서겠다고 하며 자릴 박차고 나가더란다. 신부될 사람의 아버지 직업이 중소기업 과장이라는 사실에 대해 실망을 한 것이다. 신식 주판기의 계산으로 따져보니 맞지 않았나보다.

어느 결혼상담소 소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장인될 사람의 직업이 높아야 하고, 고소득자이어야 하고, 아내될 사람의 인품은 후순위란다.

신식 계산기는 더하고 빼는 계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곱하고 나누되 그 배수의 몸집을 키우는 재주도 부릴 줄 알기에 신랑 신부 짝짓기가 그렇게 어려워졌다. 사랑만으로는 부부의 연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직 이런 노래가 널리 애창되고 있으니 어쩌랴. ‘뿐이고’라는 노래의 가사다.

= ‘여기에 있어도 당신뿐이고 저기에 있어도 당신뿐이고/ 이 넓은 세상 어느 곳에 있어도 내 사랑은 당신뿐이다./ 힘든 날은 두 어깨를 기대고 가고 좋은 날은 마주 보고 가고/ 비바람 불면 당신 두 손을 내가 내가 붙잡고 가고/ 돈 없어도 당신뿐이고 돈 많아도 당신뿐이고/ 이 넓은 세상 어느 곳에 있어도 내 사랑은 당신뿐이다.’=

순정파만이 열창할 수 있는 노래인가. 멋있다. 진정 사랑하는 사이라면 사랑 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왕관도 벗어버린 어느 고전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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